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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칼럼]노 대통령의 2005년

입력 | 2005-01-05 18:32:00


새해를 시작하는 화두는 단연 ‘희망’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뭔가 기대를 가질 수 있고, 그러한 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는 뜻일 것이다. 뒤집어 보면 한국 사회의 ‘희망 갈증’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말도 된다. 새삼 희망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일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캐고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국가적으로 희망을 담는 그릇이 없었거나 부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달라지고 있나▼

그렇다면 여러 곳, 많은 사람의 희망을 모으고 담아서 키우는 ‘희망 그릇’은 무엇이겠는가. 싫으니 좋으니 해도 정치가 국정 운영의 중심축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권위주의와 권력형 비리의 온상이었지만 경이적인 압축 성장의 동력을 발휘한 것도 정치적 리더십이 아닌가. 정치가, 특히 대통령이 먼저 희망을 키워 내야 한다. 지금처럼 절망을 뿌려서는 안 된다.

지난해 첫날 필자는 본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2004년’을 언급했다. 대통령의 언행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안감과 국정 난조로 리더십이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이로 인한 신뢰 상실의 악순환을 지적했다. 사회 전반의 리더십 붕괴로 곳곳에서 저항의 맛과 멋이 번지고 있다고도 했다. 재신임론이나 하야론으로 대통령의 거취가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신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맺었다. 한마디로 신뢰 상실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요지였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두 차례 심판과 전국을 흔들어 댄 갈등시위 등을 뒤돌아볼 때 예상은 불행히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정치상황을 예견할 수 있는 주제도 못된다. 단지 눈앞 현상의 줄거리를 이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뿌린 대로 거둔 것 아닌가. 희망을 이야기하는 새해라면서 꿉꿉한 일을 다시 꺼내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유가 있다.

최근 대통령의 메시지가 미묘하기 때문이다. ‘관용’ ‘포용’ ‘협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가 하면 집권세력 안에서는 새해 국정 운영 기조가 ‘민생’ ‘통합’ ‘화해’로 새롭게 설정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년사에서 대통령은 ‘공동체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분열적 편 가르기와는 전혀 다른 언어의 선택이다. 원칙을 지킨다는 대통령 스스로는 ‘변했다’는 말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보는 시각이 꽤 있다. 이제 핵심은 대통령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가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국가보안법이 박물관행인지, ‘차분하게’ 가는 것인지 애매하다. 대통령은 ‘싸울 일이 없다’고 하지만 집권당은 안팎으로 혈투를 벌이고 있다. 판이 이렇게 돌아가니 지켜보는 국민만 헷갈린다. 이런 모호함 때문에 신뢰가 쌓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뜻이 무엇이냐’ ‘대통령이 달라졌느냐’는 풀이에 여러 사람이 매달리는 것은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신뢰가 문제되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잖은가. 대화와 타협, 관용과 포용을 언급한 후 최근 대통령 지지도가 오르고 있다는 청와대 사람들의 해석이 있다. 그 분석이 옳다면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변화의 기대를 갖게 했다는 점도 분명하다. 뒤집어 보면 말 한마디라도 믿어 보려는 그런 착한 국민에게 그동안 감동을 주는 말이 없었던 셈이 아닌가.

▼올해의 과제도 신뢰다▼

나는 새해의 묘약(妙藥)도, 정치판의 묘수(妙手)도 믿지 않는다. 새해라고 천지개벽(天地開闢)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겠는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고, 때론 더욱 지루하고 힘겨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치 주역의 면면은 그대로 아닌가. 그들의 성장 배경과 굳어진 성정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문제는 정치 주역은 변함이 없는데 희망 욕구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도 ‘희망 그릇’에 담아 내지 못한다면 그때 무섭게 달라지는 것은 민심이다. 대통령의 최대 과제는 올해도 신뢰다. ‘변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답은 실적뿐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