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깊이 성찰하지 않은 이상주의는 예기치 못한 실패를 낳을 수 있다. 1993년 미국의 톰 하킨 법안은 ‘아동착취’를 막기 위해 외국의 미성년 노동자가 만든 의류제품의 미국 내 반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해고된 미성년 노동자가 학교와 가정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거리의 아이들로 전락했다.
▼시장 무시한 공정거래법 개정▼
여당은 국회 정무위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정부안대로 밀어붙였다. 그동안 정부와 여당은 우리나라 기업집단의 문제로 ‘가공자본’과 ‘황제경영’을 지목하고, 시장개혁을 통해 이를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시장개혁에 몰입하면서 ‘독립경영’과 ‘전문경영’체제 구축이라는 ‘이상주의’에 빠졌다. 거미줄 같은 출자관계를 정리하고 총수의 전횡을 견제하면 이상에 근접함은 물론 국가경쟁력도 향상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사전적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시장개혁의 제반조치가 국가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는 문제다.
기업경영은 ‘합리적 관리’ 그 이상의 것이다. 기업가 정신은 이용되지 않은 미지의 잠재적 시장기회를 포착하려는 깨어 있는 경각심으로, 역설적으로 ‘전횡’에 가깝다. 세계 최대 기업인 GE의 잭 웰치도 경영전횡을 했다. 전횡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경영성과로 판단돼야 한다. 관리중심의 경영으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다. 한편 기업집단의 출자관계가 복잡해진 것은 사업부를 독립법인으로 분사화하거나 신규사업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계열사가 신설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자관계는 기업집단의 사업 포트폴리오 경영판단의 결과로 존중돼야 한다. 설령 출자관계가 복잡하더라도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최근 ‘시장의 힘’에 의한 계열분리 등으로 출자관계가 부분적으로 단순해진 것도 사실이다.
시장개혁은 ‘전문경영 대 소유경영’, ‘독립경영 대 계열경영’ 식의 이분법적 정책사고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출자규제 졸업기준도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 예컨대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출자관계가 왜 계열사 5개인지를 사전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다. 소유지배구조도 자본시장의 규율하에 투자자와 기업의 선택사항이어야 한다.
또한 기업의 재산권과 경제자유를 제한하는 출자규제와 의결권 제한 같은 반(反)시장적 조치로 시장규율이 작동하는 시장개혁을 이루겠다는 것도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담고 있는 ‘25%의 출자규제와 15%의 의결권 제한, 그리고 3년간 계좌추적권 연장’에서 이 3개의 숫자는 마력의 숫자가 아니다. 시장규율을 ‘설계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시장규율의 작동은 설계 대상이 아니다.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은 우량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어렵게 할 것이다. 여당은 고객 돈을 기반으로 한 의결권 행사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결권 제한은 고객자산 관리라는 금융계열사의 ‘충실의무’에 배치된다. 이는 또 관련법령에 의거한 지분 ‘취득규제’에 행사제한을 더한 중복 규제로, 외국계 금융회사에는 적용되지 않고 국내 금융계열사에만 적용되는 ‘역차별적’ 규제이다. 이는 선진국도 입법례가 없는 반시장적 규제다. 자본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경영권의 국적은 소중한 무형자산이다.
▼힘으로 통과시킬 사안 아니다▼
현재 외국인 지분 등을 감안할 때 기업에 대한 시장감시 기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민간기업의 사(私)영역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정거래법의 본회의 통과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결코 힘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 경로의존성을 백안시하고 이상주의에 포획된 개혁은 오히려 성장동력을 훼손시킬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