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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입력 | 2004-09-12 18:50:00

그림 박순철


낙양성 안이 안정되자 한왕 유방은 하남군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냥 새로 얻은 땅을 으스대며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현읍(縣邑)의 실정을 살피고 그곳 부로(父老)들을 모아 위로하는 자리를 만드는 게 그 목적이었다.

“듣기로 나이든 이에게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고 비단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어르신은 거듭된 전란으로 연명할 곡식조차 넉넉하지 않고 베 조각으로도 몸을 가리기 어려우니, 비록 내 죄는 아니나 실로 만나 뵙기가 송구스럽습니다. 그러하되 어려운 때가 있으면 즐거운 때도 있기 마련, 여러 어르신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늘과 사람이 아울러 도와 과인이 무도한 도둑 떼를 쓸어버리는 날에는 반드시 옛말하고 살 만큼 평온하고 넉넉한 시절이 올 것입니다.”

한왕은 그런 말로 전란에 놀란 부로들의 가슴을 쓸어주고 그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군사들을 단속하여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니, 관중에서처럼 하남의 인심도 한나라로 흠뻑 쏠렸다. 뒷날 천하를 다투는 이들이 되풀이 흉내 내는 혁명의 전략전술이었다.

그 사이 시월이 가고 동짓달 모진 추위가 시작되었다. 하남군을 대강 돌아보고 낙양으로 돌아온 한왕에게 대장군 한신이 말했다.

“이제 하남을 평정하셨으니 서위(西魏)로 올라가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서위를 차지하면 바로 조나라의 문턱에 이르니, 틈을 보아 상산왕 장이의 한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량은 생각은 달랐다.

“상산왕의 한을 풀어준다는 것은 조나라를 쥐고 흔드는 진여와 제왕(齊王) 전영을 아울러 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아직 항왕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데, 강한 적을 둘씩이나 만들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 반대를 드러냈다. 한왕도 한겨울에 군사를 움직이는 게 마음 내키지 않았다.

“등 뒤가 되는 한(韓)나라가 여태 평정되지 않았는데 관중에서 그렇게 멀리 나아가도 괜찮겠소? 더구나 지금은 엄동이라 성안에 머물러 지키기는 좋으나 먼 길을 가서 굳게 지키는 성을 치기는 좋지 않은 철이오.”

그런 말로 엉거주춤 낙양에 머물러 있는데, 갑자기 양성에서 사자가 달려와 알렸다.

“삼가 승전보를 아룁니다. 대왕의 명을 받들어 무관을 나온 한(韓) 태위께서 한왕(韓王) 정창을 쳐부수고 그 왕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지난 달 중순 한왕은 장량의 말대로 한 태위 신(信)을 무관에서 불러냈지만 그가 그렇게 정창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태위 한신에게 맡긴 군사가 많지 않은데다, 상대인 정창이 예사 장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항우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아끼고 믿어 대군을 주며 무관을 지키러 보낸 터였다.

“과인이 한 태위에게 딸려준 군사는 기껏 1만명을 넘지 않았다. 무슨 수로 정창의 대군을 이겼단 말이냐?”

한왕이 믿지 못해 한태위 신의 사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사자가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일러주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