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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신지호/‘보수’ 세번 죽이려는 한나라

입력 | 2004-07-13 18:29:00


21세기는 보수의 시대다. 이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문제다. 냉전 종식이 사회주의의 몰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좌파 이데올로기의 위기를 내포한다. 영국 토니 블레어 정권이 제창한 ‘제3의 길’은 이런저런 언어포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좌파 노선으로부터의 명백한 일탈이다. 이는 우경화하지 않고는 그 어떤 좌파 이데올로기도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윤 추구에만 혈안이 돼 있던 ‘싸늘한 자본주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복지를 향한 좌향좌’를 단행했듯이, 성장을 해결하지 못하는 진보는 21세기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무능한 진보 대체할 세력 필요▼

그런데 유독 한국의 이념시계만 거꾸로 돌고 있다. 국민적 에토스를 모아 2만달러 고지를 향해 전력질주해도 될동말동한 이 무한경쟁시대에 집권세력은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들춰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국민 다수가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건만 민생돌보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일진상규명법 개정과 국가보안법 개폐, 지배세력 교체를 위한 수도 이전, KAL기 격추사건 재조사 등 ‘과거와의 전쟁’에 올인하고 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보수는 힘있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해 보자는 것이며, 진보는 더불어 살자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왜곡된 관념이다.

일부 지식인들은 한국사회를 논함에 있어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진보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386과 인터넷 세대가 보여준 질풍노도 같은 힘을 고려할 때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견해를 달리한다. 파괴에는 능하나 건설에는 취약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무능력한 진보에 대한 대중적 염증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정권은 또다시 대통령직을 걸고 수도 이전 문제에 올인하고 있으나, 국민적 면역이 생겨서인지 더 이상 그런 식의 대란대치(大亂大治) 전략은 통용되지 않을 듯싶다.

기존 진보세력의 쇠락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그 속도다. 이 속도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대안세력의 존재 여부다. 그 존재가 확실하면 할수록 변화는 빨라질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미우나 고우나 한나라당을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나라당이 ‘도로 한나라당’이 되겠단다. 당명도 바꾸지 않고 새 강령도 채택하지 않겠단다. 이로써 19일 전당대회는 요식절차로 전락했다. 당명과 강령의 개정은 포장을 새로 하는 전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산업화세력에서 21세기 선진화세력으로 환골탈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경상도 ‘묻지 마 지지층’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으려고 기존 간판을 유지하겠단다. 기막힌 노릇이다. 본질의 변화가 없는 간판 변경은 얄팍한 상술이나, 본질의 변화를 막기 위한 기존 간판 고집은 무사안일이자 직무유기다.

한나라당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거늘 국가 중대사에 대한 대안 제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뜻하고 유연한 대북정책’을 펼치겠다는데 햇볕정책과 뭐가 다른지 그 알맹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도 이전에 대한 어정쩡한 자세는 국민을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도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보수신문을 맞수로 선택했겠는가.

▼혁신 청사진 없으면 대체될 것▼

정책정당은 한강물을 떠다가 금강산에서 합수제(合水祭)를 지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충청도로 갈까요, 서울로 갈까요’를 번뇌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비겁한 포퓰리즘일 뿐이다. 지난 두번의 대선 패배로 한나라당은 보수를 두번 죽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발본(拔本)적 혁신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19일 전당대회는 최소한 그런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작업을 소홀히 한다면 한나라당은 기득권 보수, 기회주의적 보수, 수구 보수로 귀결될 것이요, 그런 보수는 배고픈 보수, 영혼이 있는 보수, 개혁 보수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력에 의해 대체돼 나갈 것이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