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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와 고오-식민지 조선의 미디어에 나타난 일본 및 일본인

입력 | 2004-05-19 15:24:00


○1919년 3월, 일본의 압정에 항거한 조선민중의 3·1독립운동에 의해 일본은 통제의 수단을 느슨하게 해 로 전환하고 사이토총독의 유화정책 아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 발행을 허가하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의 창간호에서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민주주의를 지지함 ▽문화주의를 제창함 - 이라는 3대강령을 내세우며 발족했으나 창간사는 고 이미 당국의 탄압을 예기하고 있었다. 실제 이 신문은 창간후 합계 3회, 280여일간에 걸친 정간처분 외 압수, 배포금지 등의 압박을 수없이 받았다.

이 신문이 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가 압수된 1925년 9월 21일자 사설은 고 문화정치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러한 정책의 구체적인 예로써 이 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1926년 2월 22일자 사설=압수).

조선의 철도와 전신전화 도로 그리고 그 외 문명의 이기(利器)는 현재 조선인의 생산력에 비해 과도하게 발달했다. 그것이 조선인의 생활상 필요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되레 조선인에게 부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 경성과 그 밖의 도시의 화려함 (...) 경찰청사의 과분하게 높은 가격의 건물 (...) 은 조선인이 토지를 잃게 되는 간접적이고도 중대한 원인이 됐다.

의 실체는 통치강화가 주된 목적이며 식민지화에 의해 조선민중의 생활이 저락(低落)을 면치못한 일이 이와같은 사설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민족지는 식민지 경제 아래 대중의 생활이 압박받는 실정을 호소했다. 동아일보는 는 사설(1931년 3월 6일자)에서 라고 하는 등 조세와 노동력 부담의 과중함을 시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 신문은 1939년 년말 평양의 토막민(土幕民 - 토굴생활자) 르포를 보도했다. 농촌의 궁핍함을 못견뎌 고향을 떠난 하층의 소작농들이 도시에 흘러들어 극빈생활을 하는 모습이다.

< 다리 기슭에 굴을 파고 짚과 판자때기만으로 지은 황폐한 집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북극도 아닌데 방안에서 얼어죽는 불행과 원통함이 이 마을에서는 그치지 않는다. 추위가 닥쳐 일할 수 없게 되면 부녀자와 노파들은 돈많은 집에 동냥하러 다닌다>(동년 12월14일자).

○ 이러한 민족지는 일중전쟁(1939년) 이후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적 논조에서 비켜갔으나 을 강요하는 등 언론통제가 더욱 엄해진 가운데 결국 1940년8월10일 이라는 명목으로 두 신문 함께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의 경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해 시상대에 선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말소해 8월25일 석간지면에 실은 까닭에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처분을 받았다. 으로 알려진 이 사태는 다시 한번 민족감정을 고무시켰다.①

전후(戰後) 일한관계에 투영

○ 일본이 식민지조선에서 행한 미디어정책은 전후 일한관계에 후유증을 남겼다.

○ 식민지시대 미디어에서 보여졌던 일본과 조선반도의 수직적인 관계는 전후 미소(美蘇) 냉전기의 정책아래서 국력이 앞선 일본의 친한파가 한국의 친일파를 돕고 계몽한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이 정치 경제 양면에 걸쳐 일한유착을 낳고 양국간의 를 덮고 은폐해 국민 레벨의 화해를 저해해 왔다.

○ 한편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수평적인 관계가 싹텄다.

이미 1970년대 중반,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에 저항한 동아일보의 언론투쟁(1974~75년)에 적지않은 일본시민이 자주(自主)광고를 이 신문에 실었다.

○ 2002년 월드컵 축구는 일한 미디어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것은 민주주주의 체제하에서 미디어가 민족간의 화해를 촉구하는 힘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②

① 동아일보 폐간의 사정에 대해 한국4.7언론인회편 (1947년)은 고 하고 있다.

② 예를 들어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는 약 한달간의 월드컵 대회기간을 통해 일한 신문사상 처음으로 양지(兩紙)의 기자칼럼을 교환, 원문(번역은 옆에 딸림)으로 게재했다. 이와함께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한 재일작가 유미리의 소설 을 동시연재한 것도 첫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