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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화 두소리]‘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입력 | 2004-04-07 16:35:00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12시간을 다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과연 새로운 영화인가.

이 작품을 연출한 멜 깁슨을 훌륭한 감독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주로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육받은 심영섭씨와 무신론자인 남완석씨 부부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미사’라고 얘기하는 아내 심씨와 그저 ‘잔혹한 예수 학대극’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남편 남씨의 대화를 들어본다.

참고로 영화 제목 속의 ‘패션(Passion)’은 열정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뜻.》

▽심영섭=이 영화를 보면서 전혀 새롭지 않은 스토리를 이렇게 강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좋은 영화라고 하면 새로운 스토리,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큰 비중을 두잖아. 그런데 ‘패션∼’은 좀 과장해서 모든 인류가 다 아는 얘기잖아.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알고 있던 복음서 얘기가 마치 처음 듣는 얘기인 것만 같아.

▽남완석=사실 예수의 마지막 고행을 다룬 장르는 역사가 깊어. 중세에는 예수가 마지막 며칠 동안 고문당하고, 십자가 지고, 못 박히는 것만 따로 분리해 보여주는 ‘수난극’이란 장르가 있었지.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가 완전히 새로운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

▽심=그러나 할리우드가 양산한 종교 영화 중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다른 면이 있어. ‘십계’나 ‘왕중왕’에서는 예수에게 카메라도 가까이 대지 못하잖아. 숭배의 대상이니까. ‘패션∼’은 예수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 예수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그런 점에서 이전 종교영화와는 한 획을 긋는 느낌이야.

▽남=성스러운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예수를 그린다는 점에는 동의해. 하지만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이유는 그보다 예수의 몸에 가해지는 참혹하고 끔찍한 고통 때문이야. 결국 폭력성이 영화를 화제로 만든 핵심적 이유인 것 같아. 일종의 예수 학대극인 거지.

▽심=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편집술에 있어. 이전 영화들은 예수가 손에 마취주사 맞은 듯, 십자가를 메고 갈 때도 거의 슈퍼맨 같은 예수잖아. 이 영화에서는 예수가 엄청난 고통을 당한 뒤 교차 편집으로 열두 사도와 함께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장면이 끼어들어. 예수가 어떤 심정에서 그 말을 했는지 이 영화만큼 강렬하게 느껴본 적은 없었어.

▽남=그런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용해 신앙심을 고양시키는 것이 바로 수난극의 전략이었지. 당시 성서는 라틴어로 쓰여 있는데 신자들은 까막눈이잖아. 그래서 수난극을 통해 예수가 겪었던 고통, 끔찍한 폭력을 보여주고,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감정을 일으켜 신앙으로 이끌었던 거지. 말하자면 관객의 심리를 조작하는 거야.

▽심=그건 그렇고, 이 영화가 몰고 온 반유대주의 논란은 어떻게 생각해?

▽남=내가 볼 때 표면적으로 영화는 반유대주의를 내세우진 않아. 영화의 기본 입장은 마지막 예수가 하는 말에 담겨 있지. ‘주여 이들을 용서하소서,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예수를 잔인하게 때리는 병사들도 사악하기보다 무지해 보이지. 하지만 워낙 예수에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가 강렬하기 때문에 저절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생길 것 같아. 그러니 반유대주의 감정을 일으키는 위험요소는 다분히 있는 셈이지.

▽심=나도 영화평론가로서는 이 영화가 강렬하지만 위험한 영화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 깁슨이 얘기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자’는 거 아니겠어. 너무 순진한 발상인지는 몰라도. 거기에 이 영화의 아이러니가 있어. 유대인을 사랑하자고 하면서 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거지. 이게 깁슨의 한계요, 할리우드의 이분법적 사고인 것 같아.

▽남=어떻게 보면 소재나 주제도 그렇고,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보여준 전략도 그렇고, 종합적으로 말하면 멜 깁슨은 좀 시대착오적인 것 같아. 그가 생각하는 영웅은 가학적인 고통을 온몸으로 이겨내면서 의지를 관철시키는 남자들이야. 굉장한 보수주의자에 마초야 그는.

▽심=내가 보기에 ‘패션∼’은 영화감독 멜 깁슨의 승리가 아닌, 신앙심 깊은 인간 멜 깁슨의 승리야. 그러니 영화평론의 그물로 보는 자체가 헛되지. 그래도 자기 신앙과, 그 신앙을 영화적으로 전파해야겠다는 감독의 진정성은 느껴져.

그런데 이 영화를 극사실주의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돼. 얼마나 인공적인 영화인데. 빛과 어둠을 최대한 이용해 예수에게 신과 인간의 경계를 테스트하지. 광원도 인공적이고, 편집술도 인위적이야. 슬로모션도 굉장히 많이 사용해. 아람어를 사용하는 등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만 사실주의는 아니야.

▽남=극사실주의라는 말은 표현적 개념에서 얘기들 하는 거지. 내가 보기에 영화의 전체 분위기는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것 같아. 멜 깁슨은 폭력을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과정에서의 폭력을 용인하는 것 같아. 대의를 위해, 정의를 위해 폭력은 허용이 된다 이거지.

▽심=‘패션∼’에는 유혈이 낭자하고 창자가 쏟아지는 등 하드고어적 요소가 있어. 성모 얼굴에 피가 튀는 장면은 처음 본 것 같아.

▽남=영화 자체가 ‘과장의 과잉’이지. 감독은 그 정도 자극이 아니면 사람들이 두려움이나 공포, 고통을 못 느낀다고 본 것 같아. 영화적으로 설명이 많고 유치한 면도 있고. 악마가 뱀으로 등장하지 않나.

▽심=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미션’이란 영화가 생각났어. 영화평론가 눈으로 보면 ‘미션’은 한심한 영화야. 선교사가 원주민들을 교화하는 문화제국주의 영화거든. 그래도 개봉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어. ‘패션∼’의 운명도 그렇지 않을까?

▽남=논리와 이성을 떠나 특정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맞아. 거기 찬물 끼얹고 싶지 않지만 영화의 득과 실을 저울질하면 실이 더 많은 영화야. 폭력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되는 위험성, 반유대주의의 위험성 등. 그래서 감동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딴지를 걸게 돼. 난 ‘패션∼’을 보면서 몬티 파이튼의 ‘성배’가 생각나더라. 그 영화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 휘파람 불고 노래를 하잖아. 그런 도발이 전통적 영웅담보다 더 새롭다고 생각돼.

▽심=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사물이 새롭게 느껴졌어. 이 영화를 보면 침묵하고,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영화를 본 뒤 길거리에서 귤을 봤는데 마치 태양을 간직한 거대한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에는 사물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점이 있어. 영화평론가가 아닌 인간 심영섭이 보기에는, 유치하고 단순해도 그런 힘이 있다고. 난, 극장문을 나서면서 딱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 ‘예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후후. 난 이 영화를 보며 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확신했어. 예수의 숨이 끊어지는 장면에서 하나님의 시점 셧이 나오는데 눈물이 떨어져. 눈물이 딱 한 방울인 걸로 봐서 하나님은 남자임에 틀림없다고.(웃음)

정리=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