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갈수록 더 억울하고 답답하네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의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안’이 9일 국회 통과가 무산되자 ‘문경 석달동 양민학살 피해자 유족회’ 대표인 채의진(蔡義鎭·69·경북 상주시 이안면 이안리)씨는 “억울한 사연이라도 알아 달라”며 이같이 말했다.
1949년 12월 24일 낮 초등학교 3학년이던 채씨는 동네 친구 14명과 함께 집(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달동)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산등성이를 넘자 마을이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가 마을 입구에 이르자 군인들이 막았다.
50m 정도 떨어진 논바닥에는 총탄에 맞아 숨진 아이와 어른들의 시신이 뒹굴고 있었고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86명이 숨졌어요. 12세 미만 아이들이 26명,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42명이었습니다.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국군이 쏜 총에 주민들은 그냥 죽어야 했습니다.”
그는 당시 어머니와 형, 누나를 잃었다. 다음해 6·25전쟁이 일어났고 문경 석달동 사건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세월이 흘러 채씨는 1962년 서울 문리사범대(명지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교단에 섰으나 진상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1986년 사표를 낸 뒤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다니며 유족을 만나고 증거를 모았다.
미국에도 서너 차례 건너가 6·25전쟁 전후의 자료를 확보했다. 국군 모 사단 소속 2개 중대 병력이 주민을 죽였다는 사실도 알았다.
“보상을 받기 위해 이런 일에 앞장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석달동 주민들이 몰살되다시피 했는지 이유라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채씨는 진상규명에 무심한 정부에 항의하는 뜻에서 1989년부터 지금까지 머리를 깍지 않았다. 문경 석달동 학살사건은 앞으로도 진상이 밝혀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당시 석달마을 뒤 주월산(813m)에 빨치산이 더러 있었다는 소문만 남아 있다. 이런 일과 관련해 석달동 주민들이 희생된 게 아니냐는 추측만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씨는 당시 숨진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솟대를 86개 만들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불행했던 우리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비극이지만 그냥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며 “무장공비에게 희생됐다는 호적의 기록이라도 고쳐달라”고 호소했다.
상주=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