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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 얼짱 몸짱]섹스, 거짓말 그리고…

입력 | 2004-01-18 17:11:00

현대인의 삭막한 내면 풍경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유람’(Excursion into Philosophy·1959년). 하반신을 드러내고 누워있는 여자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남자의 극명한 대비는 ‘몸 따로 마음 따로 섹스’의 비참함을 암시한다. 그림은 미국 아브람스 출판사가 낸 도록에서 발췌했다. 사진제공 이명옥씨


몸이 인간의 행복을 저울질하는 시대다. ‘정신은 고귀하고 육체는 천하다’는 생각은 ‘나는 몸이며 몸은 곧 나’라는 생각으로 180도 바뀌었다. 신체를 혐오하던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 요즘 현대인들은 몸을 가꾸고 다듬는 데 많은 돈과 시간을 할애한다. 미운 오리새끼에 불과하던 육체가 이렇게 눈부신 백조로 변신한 까닭은 무엇일까? 몸은 자아가 깃든 성스러운 장소요, 남녀가 성 정체성을 확인하는 유일한 통로임을 현대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옷차림, 직업, 외모로 남녀를 쉽게 구분할 수 있었지만 현대는 이런 것으로는 식별이 모호하다. 그러다보니, 남녀는 오직 상대의 ‘몸’을 접촉하면서 그가 혹은 그녀가 나와 다른 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 교수인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저서 ‘남자’에서 평소 현대인들이 몸을 얼마나 귀중한 사유재산으로 여기는가를 다양한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안창홍 작 ‘우리도 모델처럼 3’(1991년·부분). 두 남녀가 자신들이 벌이는 성적 행위와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훔쳐보는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차갑고 우울한 청색 배경과 냉정하도록 무감각한 두 남녀의 표정은 사랑이 배제된 성을 주고받는 현대인들의 고독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이명옥씨

거리와 건물 내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찍은 필름을 살펴본 결과 타인의 육체와 닿는 것을 꺼리는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놀랄 만큼 민첩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적으로 민감한 신체부위에 타인이 접근하면 몸은 즉각 경보음을 울리고 방어태세를 갖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곧 인격에 대한 침해로 간주한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러나, 타인이 금지구역인 육체를 침범하는데도 자진해서 몸의 빗장을 여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사랑에 빠질 때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육체에 대한 거부권을 반납하고 친밀한 몸의 대화를 나눈다. 섹스가 인간에게 값진 선물인 것은 ‘내 몸이 네 몸’이 되는 특권을 상대에게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독한 현대인들에게는 서로의 몸을 통해 마음의 벽을 허무는 과정조차 오디세우스의 여정처럼 험난하기만 하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을 보면 두 인격체가 한 공간에서 만나 교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한다. 섹스가 끝난 후일까? 여자는 등을 돌린 채 누워있고, 남자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 어딘가를 응시하며 앉아 있다. 하반신을 드러낸 여자와 옷을 입은 남자의 극명한 대비는 두 남녀가 ‘몸 따로 마음 따로 섹스’의 비참함을 되새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 걸음만 창문으로 발을 옮기면 두 사람은 밀폐된 방을 탈출해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자연을 호흡할 수 있건만, 남녀는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달팽이처럼 자신의 껍질 속에 갇혀 있다. 황량한 방안 풍경은 반딧불이처럼 한순간 빛을 발하다 꺼지는 섹스의 허무함을, 닫힌 마음의 문 앞에서 상처받는 현대인들의 고독을 거울처럼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호퍼는 감정의 실어증(失語症)에 걸린 도시인들의 삭막한 내면풍경을 일기를 쓰듯 정직하게 기록했다. 거창한 주제보다 부초처럼 떠도는 인간을 그린 것은 ‘나는 나 자신을 그리려고 노력할 뿐’이란 그의 평생의 신념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몸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인간의 자아가 둥지를 튼 장소요, 숨겨둔 정체성을 보물찾기처럼 더듬어 확인하는 곳이다.

우리가 몸을 아끼는 것은 사랑하는 너를 내 몸에 영접하기 위해서다. 사랑은 그대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갈망이기에….

이명옥 사바나미술관장 국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