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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김영식/외교부의 ‘당당한 거짓말’

입력 | 2003-09-13 17:36:00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이라크의 ‘이’자(字)도 나오지 않았다.”(이수혁·李秀赫 외교부 차관보·9일 오전 11시53분)

“윤 장관이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을 만났을 때는 이라크 재건 협력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얘기만 있었다.”(위성락·魏聖洛 외교부 북미국장·오후 1시13분)

“혹시 정치권에서 윤 장관의 방미 성과를 흠집 내려고 그의 방미 중 파병 요청이 있었다는 말을 하는 것 아닌가.”(외교부 당국자·오후 4시16분·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국방부가 추석 연휴 전날인 9일 오후 7시 “미국이 한국군 이라크 추가 파병을 요청해왔다”고 발표하기 직전까지 외교부 당국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 이처럼 모르쇠로 일관했다. 마치 사전에 짜고 입을 맞춘 듯했다.

하지만 본보 취재진의 끈질긴 취재가 계속되자 외교부 관계자들은 ‘보안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뒤늦게 입장을 바꾸었다.

이 차관보는 이날 오후 6시반경 외교부 기자실을 찾아와 “이달 3, 4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미래동맹 협의 과정에서 미국측이 한국군 추가 파병 요청을 해 왔다”며 “다만 울포위츠 부장관이 5일 워싱턴에서 윤 장관을 만났을 때는 ‘군사 당국 등을 통해 파병 요청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따라서 이를 공식 요청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처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말을 바꾸면서 그가 내놓은 변명이었다. 그는 “외교관은 정직한 거짓말쟁이”라고 얼버무렸지만 발언 속에는 ‘국익 때문이라면 외교관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식의 당당함마저 느껴졌다.

이에 앞서 외교부 당국자가 말한 ‘정치권의 윤 장관 흠집 내기’ 운운의 발언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다. 보스에 대한 맹목적 충성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자세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윤 장관이 미국 방문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만난 것을 ‘한국 정부의 외교력의 성과’로 자랑했던 외교부로서는 윤 장관의 부시 대통령 면담을 한국군 파병 요청과 연계하려는 해석이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다 올봄 이미 비(非)전투 병력의 이라크 파병 문제로 홍역을 치렀던 정부로서는 추가 파병 문제는 곤혹스러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뒤 밝혀질 사실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었다가 말을 바꾸면서 외교부 당국자들이 내놓은 해명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 해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어렵고 힘든 ‘국가적 난제’일수록 정면 돌파를 통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게 보다 정직한 외교 당국자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김영식 정치부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