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현대 비자금 수수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를 놓고 여권 일각에서 다시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검찰은 권씨가 2000년 4월 총선 때 거액의 현대 비자금을 받았다는 정황을 확인하고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이미 구속영장을 청구한 상태다.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정치권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검찰 수사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자 검찰의 중립성을 해치는 행위이다.
음모론의 논거도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여권의 신당 추진세력이 비주류의 좌장격인 권씨를 제거함으로써 신당 창당의 동력(動力)을 얻으려 한다는 게 음모론의 기본줄기 같은데 한마디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본다.
문제의 비자금이 총선 때 누구에게 지원됐는지 권씨가 입을 열 경우 곤란해질 쪽은 오히려 주류측이다. 총선 당시 비주류는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있었지만 ‘386’이 다수 포함된 주류는 그럴 능력이 없어 권씨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컸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도 기획된 의도에서 시작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찰은 “특검에서 넘겨받은 대북 송금 수사자료에 권씨 부분이 들어있어서 수사에 착수한 것”이라고 말한다. 수사의 단초를 특검이 제공했다는 것인데 틀린 말이 아니다.
참여정부 들어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굿모닝시티 게이트’에서 대통령부속실장 향응 파문에 이르기까지 뭐든 터졌다하면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사실을 사실로 믿지 못하는 불신 풍조와 ‘음모’라는 이름으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해 죄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비겁함이 결합됐을 때 나온다.
‘권씨 비자금’의 실체를 밝히자는 것은 단순히 누구를 벌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다.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정치개혁의 디딤돌을 놓자는 것이다. 유치한 음모론 따위로 그 의미를 훼손해서야 되겠는가. 검찰은 정치권의 음모론에 개의치 말고 철저히 진상을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