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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반경'…중원을 지배했던 영웅들의 책략

입력 | 2003-05-16 17:53:00

‘반경’은 중국 요순시대부터 당나라까지의 역사를 권모술수의 정치와 인재 감별법이라는 두 측면에서 뒤집어 바라본 역사서다. 전국시대와 진시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영웅’.동아일보 자료사진


◇반경/조유 지음/829쪽 3만원 동아일보사

중국의 고전을 읽는 재미로 말한다면 단연코 그 서사가 구현하는 다채로운 인간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보여주며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골몰하게 한다.

중국 당나라 학자 조유(趙유)의 ‘반경(反經)’이 주는 흥미도 무궁무진한 인간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반경’은 번역자가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역사를 씨줄로 하고 책략을 날줄로 삼아 종횡무진으로 엮어낸 인간의 이야기이다. 요순(堯舜)시대의 이야기에서 당나라 때까지의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각 시대의 제후와 영웅호걸이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은 무미건조한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명암을 통해 이에 관련된 인간들의 삶과 그 태도를 평가하고 숱한 책략의 의미를 다시 저울질한다. 어떤 경우에는 역사의 뒷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오히려 전면의 역사를 이끌었던 힘의 원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경’의 흥미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당대의 살아있는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경전 이야기가 모두 역사의 전면에 서 있던 성현의 가르침을 다루고 있는 데 반해 ‘반경’은 역사의 반면에 서서 수많은 인간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앞세운다.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참인간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인간에 대한 경영의 책략으로 따진다면 이 책의 내용을 따를 것이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을 아는 것이 군왕의 길이고 일을 아는 것이 신하의 길이다’라고 말한다. 남을 다스리는 자는 사람들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자기의 재능만을 자기 능력으로 삼는다. 그만큼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강조한다.

둘째,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의 진폭이다. 이 책은 요순시대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의 긴 역사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재편한다. 중국 정통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비견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에 근거하여 인간을 찾아내고 그 삶을 새롭게 해석하며 거기서 다양한 책략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역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 속에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예컨대 춘추전국시대에 영웅호걸이 다투는 장면들이 제시되는 가운데 제자백가의 전적을 인용한 명쾌한 해설이 뒤따른다. 삼국의 정립과 할거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는 영웅들의 지략과 용기가 다시 살아난다. 이 책의 흥미는 바로 이 같은 풍부한 역사성에서 비롯된다.

셋째, 실천적 삶의 철학을 폭넓게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인간의 이야기를 도덕적 관념에 근거하여 논의하지 않는다. 대신 실천적인 삶의 과정을 중시한다. 저자는 ‘아름다운 옥(玉)으로 만든 배와 노는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요 금과 옥으로 만든 활은 화살을 쏘지 못할 것이다’라는 옛말을 인용하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서 고고한 체하는 인간을 경멸한다.

인재의 장단점과 신하의 행실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가장 중시하는 것은 실천적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 구체성을 떠나서는 어떤 삶도 의미를 부여받기 어려운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오늘의 현실 문제에 대한 실천적 접근법을 다각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저자의 의도와 연관된다.

‘반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책의 저자가 내세우고 있는 것은 처세의 방법이나 책략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경세의 철학이다.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쓰면서 던졌던 다음과 같은 저자 자신의 질문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정치의 기초를 돈독히 하여 시대의 폐단을 없애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나라의 위기를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권영민 서울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