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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이현희/임시정부 기념관을 세우자

입력 | 2003-04-10 18:39:00


‘10년간 다른 민족의 통치를 받던 우리 민족이 다시 우리 민족 자신의 (임시)정부를 가짐이 어떠한 행복이며 어떠한 영광이냐. 비록 아직 우리 국토를 찾지 못하고 여러 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했어도, 또한 우리 임시정부를 서울에 세우지 못하고 외국의 영토에 세웠어도 우리 희망과 정신의 중심적이요….’

이 글은 중국 상하이판 ‘독립신문’의 창간 동인이며 임정을 세운 의정원 의원이자 동아일보 특파원을 역임한 애국지사 조동호가 지은 ‘한민족의 독립’ 중 ‘임시정부와 국민’이란 글의 일절이다. 이는 또한 이동녕 의정원 의장이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임시헌장인 성문법(10개조)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한 뒤 1945년 광복 때까지 27년간 중국 각지를 이동하며 광복운동의 출범을 알리는 힘찬 목소리였다.

비록 외국(상하이)에 수립됐으나 임시정부는 민족의 희망과 정신의 중추이고 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근원이며 당시 2000만 남녀의 충성의 대상과 목표임을 새삼 높이 외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5번의 개헌을 통해 헌법의 토대 위에 지도원리를 대통령중심제 등으로 밝히고 그 대표가 내외를 통치함으로써 법통성을 고수해 왔다.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입헌주의적 삼권분립형 자유 민주정부의 신기원을 명시했으며 일제 강점 하에서도 5000년 역사의 맥을 이어온 국가의 구심점이었다.

임시정부는 또 왕조사의 청산인 동시에 19세기 이래 압박받던 약소 민족 독립의 청신호이며 근대국가 탄생의 전범(典範)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그 법통성이 문자로 명시된 것은 1988년 제9차 개헌에 이르러서였고 그로부터 다시 15년 뒤인 지금까지도 이를 뒷받침할 법제적 조치가 거의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월드컵 경기 때 외쳤던 “대한민국!”의 함성은 곧 임시정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 임정은 한성임시정부 등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합법적 순리적으로 단일화되면서 좌우를 넘어 민족의 정통성을 지켜왔다.

임정의 산파역인 석오 이동녕은 “내가 죽더라도 임정은 합심해서 독립을 쟁취하여 환국하라”고 외쳤고, 성재 이시영은 “임정은 곧 다시 찾은 우리나라”라고 감격했으며, 조소앙은 “임정의 법통은 승리한 뒤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설파했다. 백범 김구는 “내가 작탄(炸彈)으로 적을 응징함은 나라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 하였으며, 도산 안창호는 “지금 임정이 있으므로 내외 국민이 용기백배 싸우고 있다”면서 승리를 독려했다.

임정 후기 국무위원 조경한까지 주요 지도자 40∼50명은 임정을 중심으로 합심해 8·15광복을 국정수행 차원에서 쟁취한 것이다.

애국 관련 기념관들이 산발적으로 세워지고 있으나 나라의 법통성을 상징할 종합적인 ‘임시정부 기념관’은 광복 60년이 다 되어도 발의조차 못한 실정이다. 백범기념관과 함께 임정 주요 지도자들의 정신을 기릴 기념관이 하루빨리 세워져야 한다. 백범이 지금 살아 있었다면 자신을 후원하고 키운 석오의 기념관을 자신의 기념관보다 먼저 세워야 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백범일지’ 중 석오를 극찬하고 흠모하는 글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임정 수립 84주년, 그 기념관의 건립이 절실한 순간이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