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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포커스][톡톡인터뷰]진짜 음악 고집하는 '음악의 美人' 신중현

입력 | 2003-04-08 18:45:00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신중현 작사 작곡 ‘미인’ 중에서) ‘한국 록의 산증인’ 신중현(申重鉉·65)씨가 올해로 음악 생활 50년째를 맞았다.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 6년여간 활동을 중단했을 때를 빼고는 오직 음악에 묻혀 살아온 그다. “1954년 봄, 미 8군에서 데뷔하던 때가 기억에 생생해요. 무대에 올라 정신없이 기타를 연주했죠. 조그마한 한국인의 연주에 미군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저에게 ‘히키’ ‘재키’라는 애칭을 지어줬지요. 지금도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대에 서 있죠.”》

7일 찾아간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작업실. ‘신중현 음악세계’는 적막했다. 가끔 후배들이 방문하는 것을 빼놓고 찾는 이가 거의 없다고 했다.

비록 대중으로부터 잊혀지고 있지만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이다. 한국전쟁 직후, 일본에서 건너온 트로트와 미국의 로큰롤이 유행할 때 그는 한국적인 소리에 주목했다.

‘봄비’ ‘님은 먼 곳에’ 등 우리네 한(恨)이 묻어나는 애절한 발라드부터 록, 블루스, 사이키델릭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실험했다. ‘신중현 표’ 록 사운드는 80년대 ‘들국화’ ‘시나위’, 90년대 ‘넥스트’ ‘윤도현 밴드’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록 계보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요즘 자신이 걸어왔던 음악 반세기를 정리 중이다. 2년 전부터 손수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www.sjhmvd.com)에 그동안 만들었던 노래와 작곡법, 기타주법 등을 체계적으로 띄우고 있다.

“제 음악을 알리는 창구인 셈입니다. 최근 제가 김추자 ‘펄 시스터스’ 김정미 등의 레코드판을 CD로 재발매한 것도 판매보다는 신세대에게 ‘이런 음악이 있었다’는 것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죠.”

1958∼75년 사이의 신중현의 노래들도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기간 만든 곡이 300여곡, 그 중에는 미발표곡도 100여곡이나 된다. 비록 모노 녹음에 잡음이 있긴 해도 60년대의 생생한 사운드를 되살린다는 의미가 있다는 게 그의 얘기.

그는 단독 콘서트도 추진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최고의 장비와 대형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콘서트다운 콘서트를 갖고 싶다는 것. 사라져가는 라이브 문화를 살리기 위해선 큰 무대에서 제대로 된 ‘리얼(Real)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의 꿈이 쉽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대기업과 관련 단체들을 돌아다니며 콘서트 기획안을 보여주었지만 요즘 뜨는 가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선뜻 지원 약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컴퓨터 음악은 ‘죽은 음악’에 불과합니다. 인간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신적인 음악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워요. 라이브 공연이 활성화돼야 대중음악이 살아납니다.”

그는 1958년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 음반을 낸 뒤 1964년 한국 최초의 록 밴드 ‘애드 포’를 결성해 ‘빗속의 여인’을 히트했고, 김추자 ‘펄 시스터스’ 김정미 박인수 등 ‘신중현 사단’을 이끌며 1960, 70년대 초반까지 한국 가요계를 풍미했다. 하지만 유신통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미인’ 등 발표하는 곡마다 풍기문란, 퇴폐 등의 이유로 방송 금지를 당하면서 가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모처로부터 ‘대통령 찬가’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 괘씸죄에 걸린 거죠. 1980년 해금될 때까지 백수로 지내면서 틈나면 낚시질을 갔고, 집안에 틀어박혀 ‘노자’와 ‘장자’를 읽었지요.”

대철 윤철 석철 아들 3형제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뮤지션의 길을 걷고 있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드럼 스틱과 레코드판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았죠. 가끔 작업실을 찾아오면 음악에 대한 조언을 해주곤 해요. 저나 아이들이나 뮤지션으로 사는 일이 ‘가시밭길’이지만 아직까지 버텨주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죠.”

신씨는 매달 작업실 임대료를 내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없이 사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조선 말기의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金炳淵·1807∼1863)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좋은 음악이 나온다는 것.

작업실 벽 한 귀퉁이에는 그의 삶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는 노자의 글귀가 붙어 있다.

‘문을 나오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들창으로 엿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 나가는 거리가 멀수록 알게 되는 범위는 작아진다. 그러므로 무위자연의 성인은 가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환하고, 하노라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신중현은…▼

-1938년 서울생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해 1954년 미8군 무대로 데뷔

-1964년 국내 최초의 록 밴드 ‘애드 포'를 결성, ‘커피 한잔’ ‘빗속의 여인’ 발표

-1960년대 후반 김추자 김정미 박인수 장현 ‘펄 시스터스’등을 발굴,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아’ ‘봄비’등 발표

-1973년 3인조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미인’발표

-1974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징역 4개월이 선고되면서 가수활동 중단

-1980년 9인조 밴드'뮤직파워'로 컴백해 '아름다운 강산’발표

-전기기타 산조 음반'무위자연'(1994), 솔로앨범 ‘김삿갓’(1997) 발표

-2002년 스페셜 앨범 ‘Body & Feel’발표

-가족:부인과 3남

인터뷰=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