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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도시와 예술가]엘레우시스와 플라톤

입력 | 2002-11-25 18:13:00

왼쪽부터 데메테르, 트립톨레모스, 오른쪽은 횃불을 든 페르세포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사진제공 노성두씨


《“여기에서 보고들은 것을 발설하는 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엘레우시스의 미스터리 제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이런 다짐을 받아야 했다.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오십리쯤 북서쪽으로 떨어진 도시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파종기와 수확기에 맞추어 두 차례씩 미스터리 제의가 열렸는데,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평생 한 차례는 꼭 가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침묵 서약이 어찌나 철저하게 지켜졌던지, 천년 넘게 미스터리 제의가 지속되었는데도 그 내용이 끄트머리 한 자락도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5세기에는 참배객이 해마다 3만명을 웃돌았어도 한결같이 함구하는가 하면, 입심 하나로 먹고사는 소피스트들이나 남의 일에 딴죽걸기 좋아하는 견유학파 철학자들마저 엘레우시스 제의에 대해서만큼은 입에 자물쇠를 굳게 채우고 있다. 그러니 정작 미스터리 제전의 실체보다도 비밀이 지켜졌다는 사실이 더 불가사의하게 생각될 정도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엘레우시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모시는 도시다. 데메테르는 또 곡물과 풍요의 여신이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7세기 호메로스의 ‘데메테르 송가’에 보면, 데메테르가 외동딸을 잃어버리고 아흐레 동안 횃불을 휘두르며 배회하다 닿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단다. 알고 보니 못된 납치범은 하데스, 다름 아닌 명부의 왕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제우스를 협박해서 가까스로 딸을 돌려받았지만, 일년에 넉 달은 다시 땅밑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뭐, 대강 이런 줄거리인데 대지의 여신이 죽음의 세계에 끌려갔던 딸을 다시 살려냈다고 해서 이때부터 곡물의 씨눈을 관장하는 일 말고 부활의 권한까지 인정받는다. 딱 부러지는 내세 신앙이 없었던 옛 그리스인들에게는 데메테르의 신화가 꽤 솔깃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오고, 딱딱한 씨앗에서 파릇한 움이 트는 것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한 호흡으로 묶을 생각들을 했던 모양이다.

엘레우시스의 미스터리 제의는 올림피아의 제전이나 아테네의 판아테나이아 제전과 분위기가 썩 달랐다. 떠들썩한 축제가 아니라 경건한 제사 의식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딴 도시에서 원정 온 미끈한 청년들 훔쳐보느라 처녀들 마음이 설렌다거나, 장터마다 구수한 전 부치는 냄새에다 얼근한 술판 같은 것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제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딸 잃은 데메테르 여신의 흉내를 내면서 횃불을 붙여 들고 묵묵히 성역의 빈들을 맴도는 게 고작이었을 테니까, 다른 곳에서처럼 도시 전체가 법석을 떠는 일도 없었다.

엘레우시스 성역을 살펴보면 야트막한 비탈을 끼고 펼쳐져 있다. 성역 한복판에는 가로 세로가 반듯한 정방형 건축 텔레스테리온이 들어섰다. 땅속 동굴을 파 들어가듯이 큼직한 건축물 한 틀이 비스듬한 대지의 품안에 쏙 안겨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의 신전 건축과는 다르게 기둥들이 내부에만 들어찼고, 창문은 하나도 없이 천장 복판에다 들창을 낸 구조다. 안에서 문만 닫으면 코를 베어가도 모를 만큼 캄캄했을 것이다.

텔레스테리온에 입장한 참배객들은 어른대는 횃불 아래 밤새 펼쳐지는 제의를 구경하다가 순서가 한껏 고조되는 순간 천장이 활짝 열리면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고 새삼스러운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제의에 참가한 뒤 “이곳을 찾은 인간은 남들보다 세 곱절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단정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엘레우시스 제전을 안 보고 하데스에게 불려간다면 명부에 떨어져서 뻘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부리는가 하면, 로마시대 명연설가 키케로는 또 이곳에 왔다 간 사람은 “살면서는 기쁨을 누리고, 죽을 때는 더 큰 희망을 품게 된다”고 바람을 넣기도 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미스터리 제의에서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드라마의 형식으로 공연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외딴 도시 엘레우시스는 그리스인들의 영혼과 육체가 나고 회귀하는 영원한 생명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노성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