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쇼핑, 전자금융, 전자우편 등을 사용할 때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암호는 우리 생활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몇 개의 패스워드를 기억하는 것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자신이 만든 암호가 해독될 경우 그 개인은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암호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암호를 만드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암호해독 기술도 동시에 발전했다.
▼개인부터 국가까지 보안 안간힘▼
전쟁 중의 통신 내용, 특히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는 통신문이 적성국에 의해 해독될 경우에는 전쟁에 질 가능성이 높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적국의 통신문 해독 사례는 1917년 1월17일 독일의 외무장관 아서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코드 0075’로 명명된 암호 전문을 영국이 중간에서 가로채 해독한 사건이었다. 당시 치머만 장관이 워싱턴 대사를 통해 멕시코시티로 보낸 이 전문에는, 만약 멕시코가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멕시코의 ‘빼앗긴’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영국은 이 암호 전문을 해독한 뒤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알렸고, 분노한 미국은 한 달 뒤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전세(戰勢)는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어졌다.
통신문을 암호화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문자들의 위치를 바꾸거나 다른 문자나 숫자로 치환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 암호화할 때는 이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복잡한 대수 방정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응용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순수 수학 분야인 정수론은 암호학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한다.
한편 암호를 해독하는 가장 대표적 방법은 자주 등장하는 문자의 빈도를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국의 알파벳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자를 가정해서 이것을 바탕으로 암호문의 해독을 시작하거나, 서로 비슷한 빈도로 등장하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해독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정보만으로 암호문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암호를 해독하게 된다.
정보화사회의 총아로 자리잡은 컴퓨터가 등장하는 데에도 암호 해독 발달은 커다란 몫을 담당했다. 2차 대전 중 영국은 런던 근교의 블레츨리 파크에서 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려고 노력했다. 현대 컴퓨터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였던 앨런 튜링(Alan Turing·1912∼1954)은 바로 이 암호 해독 장치 개발 도중 20세기 후반 이후의 정보화사회를 이끌어 갈 컴퓨터를 개발했던 것이다.
1943년 12월 튜링씨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세계 최초의 전자계산기로 일컬어지는 ‘콜로서스(Colossus)’를 개발했다. 콜로서스에는 약 1800개의 진공관이 활용되었는데, 1초에 약 5000자를 종이테이프를 통해 기계에 공급할 수 있었다. 그 뒤 콜로서스는 계속 개량되어 지상 최대의 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기 5일 전이던 1944년 6월 1일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다. 콜로서스는 현대적인 컴퓨터로 세상에 나타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에도 계속 암호 해독과 같은 특수한 용도로 쓰였으나, 그 정확한 형태는 비밀에 부쳐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32년의 공식적인 침묵 끝에 1975년 10월에 와서야 영국 정부는 콜로서스의 사진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도청기술, 사용도 공개도 신중히▼
휴대전화와 같이 디지털 통신장치의 도·감청의 경우에는 암호키(디지털 신호를 음성으로 풀기 위한 암호의 연산방식)를 해독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된다. 휴대전화를 도·감청하기 위해서는 통신 회사의 협조가 있거나 휴대전화에서 사용하는 암호키를 해독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첨단 장비를 이용해 도·감청을 하거나 극비로 암호해독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것은 모두 국가 안보상의 필요성 때문에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 그래서 국가 안보에 핵심이 될 정보기관의 도·감청 기술과 암호 해독 능력을 정치적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폭로하는 것은 국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안보상의 이유로 개발한 기술이 국민들을 상대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아무리 정보기관이라 할지라도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과학사학
■과학 전문지식을 시의성 있는 주제와 연결시켜 알기 쉽게 풀어쓰는 과학칼럼 ‘과학세상’과 흙속에 사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생태칼럼 ‘자연과 삶’은 토요일 격주로 이 난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