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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변법개화파와 시무개화파

입력 | 2002-07-28 17:10:00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유해는 일본에 묻혔다가 1914년 고국으로 돌아와 충남 아산에 이장됐다 [사진제공=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개화’는 이미 전반적인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잡는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의 쟁점은 조선사회의 내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과 제국주의의 외적인 압력 사이에서 사회 제도의 개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였다.

이 때 제도 개혁의 관건은 무엇보다도 ‘전제군주제의 개혁’이었고, 실제로 현실 정치에 간여했던 이들의 사상적 차이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도 정치체제의 개혁 방식에서였다.

하지만 서구문물의 유입 속에서 이 격변기를 헤쳐나가야 했던 지식인들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사상을 세우기가 어려웠고,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 차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 체제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논의의 대상에 오른 것은 큰 변화였다.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평등에 관해서는 조선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전제군주제까지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파행적인 세도정치기를 겪고 서구의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등이 전해지면서 국력 약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정치 체제의 비효율성이 지목됐다. 개화기 지식인들은 대체로 유학의 인본주의와 실학의 평등 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 조선 사회의 현실적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제도 개혁의 방향을 달리했다.

박규수의 사상을 가장 충실히 따르면서 시무개화파에 속했던 김윤식은 과부의 재가 금지나 금고제(禁錮制) 및 연좌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면서도 왕도정치의 기본 질서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시무개화파 중 젊은 세대에 속했던 유길준의 경우는 입헌군주제뿐 아니라 공화제까지 바람직한 정치제도로 인정했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보다 우선 시급한 것은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변법개화파의 김옥균은 왕권을 극도로 제한하고 소수의 개혁 관료가 실질적인 정치를 담당하는 혁명정부를 구상했다.

역시 변법개화파에 속했던 박영효는 생명보존과 자유 및 행복 추구를 인간의 공통된 특성으로 보면서, 정당활동과 현회(縣會)까지 보장하는 군민동치(君民同治)의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여기서 일단 제도를 바꾸자는 변법개화파와 제도를 제대로 바꿀 준비가 필요하다는 시무개화파의 견해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들이 개화의 방식에서 다양한 견해차이를 보이면서도, 모두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상징되는 도덕의 교육과 교화를 바탕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학문을 추구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유교적 가치 이념에 대한 자부심을 공유해 서구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정신적 바탕으로 삼았다. 이는 바로 실학의 개혁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개화파의 사상적 특성이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