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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박재창/ ‘네티즌의 마음’ 읽어라

입력 | 2002-07-09 18:51:00


월드컵의 열기가 휩쓸고 간 서울 광화문 거리에는 ‘광복’의 환희가 가득하다. 정치적 해방 이후 반세기만의 일이다. 비로소 정신적 자주와 독립을 획득한 까닭이라고 보고 싶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비하하거나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일에 순치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 대한 부정적 자세와 미래에 대한 비관적 조망이 당연한 숙명인 줄 알았다. 좌절과 굴종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환경 속에서도 먼저 찾아 온 것은 경제적 광복이었다. 근대화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기적에 매달려 사는 우리로서는 언제 한번 자기 중심의 우주를 가져볼 겨를이 없었다. 근면과 성실마저 구속과 순종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거리응원 등 사회 바꾼 주역▼

그러나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는 자신을 과거와는 다른 삶의 주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자신감 회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이목 속에 쏟아지는 갈채를 받으며 등장하는 지구촌의 스타 탄생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지구촌 중심국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값진 변화는 우리가 스스로를 긍정적 진취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월드컵은 우리에게 정신적 광복이라는 세례를 안겨 준 셈이다.

월드컵을 계기로 이런 엄청난 변화가 우리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 정신적 광복은 기획된 프로젝트의 결과가 아니며 역동과 변용의 시대적 특성이 가져다 준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노풍(盧風·노무현 대통령후보 바람)의 발진을 예의 주시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노풍의 진원지에 깔려 있는 시대적 요구를 보다 정교하게 읽을 수 있었다면 월드컵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우리가 어떻게 꾸며나갈지를 미리 점쳐 볼 수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풍의 등장과 월드컵의 성공이라는 얼른 보아 결코 상합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현상을 연결시켜주는 코드는 바로 ‘디지털 코리아’에 있다. 정보공화국 건설이 가져다 준 과실인 것이다.

‘붉은 악마’의 등장이나 거리에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은 이를 연결해 주는 가상공간에서의 대화와 자유의 폭발적 확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동통신의 발달이 있었기 때문에 즉응적이고 전국적인 결속과 연대를 불러 올 수 있었다. 월드컵의 운영 자체가 각종 정보통신 장비의 지원을 통해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던 것도 물론이다. 노풍의 발원지에 네티즌 연대가 있었다는 사실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치적 지지 철회가 노풍의 퇴조를 낳았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의 본질은 우리가 세계 최고의 정보강국이라는 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총생산 대비 인터넷 보급률에서 세계 최고다. 그것도 차순위인 뉴질랜드를 거의 두 배 정도 앞선다. 인구 대비 초고속 통신망의 보급률도 세계 최고다. 미국보다 4배정도 앞서 있다. 국민총생산 대비 초고속망 보급률은 미국이나 일본의 10배 정도나 된다. 우리나라 전 가구의 절반 가량이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정보화 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정보화 현상이 가져올 정치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지구촌 어느 누구도 아직 장담하지 못한다. 인류가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일 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지속적인 변용성과 상호작용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보사회의 정치 사회적 속성이 아주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치 물갈이’ 요구 외면 말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정보사회가 심화될수록 기존의 제도권 정치에 대한 기대를 철회하거나 외면하려는 경향이 강화된다는 점이다. 자율적 결속과 의사소통이 가져다주는 과실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우리 사회의 경우 바로 이런 정보화의 과실이 우리의 정치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다시 개헌론이 고개를 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정작 현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과제는 누가 정권을 잡는다거나 어떤 대통령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저 노도와 같은 시대 교체의 요구를 어떤 양식으로 수용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정신적 광복을 이룬 국민은 이제 어제의 정치적 신민이 아니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미국 버클리대 풀브라이트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