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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먹는 요리]‘봄날은 간다’의 라면

입력 | 2002-01-04 18:37:00


"미각의 기쁨보다 간편함이 좋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가 콧노래로 흥얼거리던 노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이다. 노랫말처럼 영화는 사랑의 열병에 빠졌던 남녀가 결국 이별하고, 그 상처로 아파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인 은수. 그녀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녹음기사 상우(유지태)와 함께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러 다닌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은수는 대뜸 라면을 먹고 가지 않겠냐며 남자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이렇게 라면을 계기로 연인 관계가 된 이들은, 그 후 뜨거운 연애를 하면서도 집에서 유일하게 해먹는 음식이 라면이다. 은수가 상우의 사랑에 싫증내기 시작할 때도 라면이나 끓이라며 상우에게 신경질을 내고, 그런 은수에게 상우는 자신이 라면으로 보이냐며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유럽의 기호심리학자 중에는 환자들을 볼 때, 그 환자가 좋아하는 요리나 먹었던 음식까지도 살피는 이들이 많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정서가 불안하고 감정 표출이 즉흥적이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 사람들 대부분이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은수가 먹는 라면은 그녀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녀에게 라면은 미각의 기쁨을 얻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 끼를 간편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음식일 뿐. 사랑마저도 순간의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해나가는 ‘은수’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라면과 인스턴트 커피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은수에 비해, “김치 담글 줄 알아?”라고 묻는 상우의 사랑은 오래 묵은 된장처럼 은근하고 깊은 것이었고, 여자에겐 그런 남자가 부담스러웠다.

라면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도 있다. 일본영화 ‘담포포’. 일본인들도 라면을 대단히 좋아한다. 이 영화는 자신만의 개성 있는 라면을 만들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이는 라면가게 여주인의 끝없는 수련기 같은 내용이다. ‘봄날은 간다’와 달리 이 작품에서는 라면 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가 꽤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 백승국/ ‘극장에서 퐁듀 먹기’ 저자·기호학 박사 > baikseungkook@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