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지만 어쩐지 스산하다. 어느 틈에 구세군의 낭랑한 종소리도, 감미로운 캐럴의 음률도 끊어져 도시는 음울한 기운마저 감돈다.
종강이 돌아오고 새 식구를 맞기 위한 입시 사무의 손길도 다시 바빠지는 대학가의 연말, 청신한 기운이 감돌아야 할 대학가의 연말 표정이 왜 날이 갈수록 침중해지는 것일까. 아, 그래, 졸업생의 사은회 자리가 남았다.
화기애애하기는커녕 묵묵히 술잔만이 오가는 사은회의 표정. 미리 마음을 단단히 하고 나가지만 술이 한 두 잔 들어가고 이들이 전해주는 취업 현장의 고뇌를 듣노라면 내가 왜 인문학 선생이 되었던가 하는 자괴감을 다시 또 쓰도록 내뱉지 않으면 안 된다. 1930년대 공황기를 배경으로 쓴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이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되살려지는 현실이다.
대학의 보루이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문학은 이제 정녕 실업예비군의 양성소로 전락해버렸다. 필자가 속한 ‘국어국문학과’의 예를 들어 말하면 전국의 대학 치고 ‘국어국문학과’가 없는 대학이 없지만 ‘이 학과를 나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막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한때는 학교의 훈장이 되고, 문학가도 되고, 기업체의 홍보광고 직능을 담당하는 산업일꾼도 되고, 신문 잡지 출판의 동량이 되는 등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후배와 제자들의 얼굴에서 그런 자부심의 표정을 읽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 벌써 노인이 다 된 듯한 쉰 목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사회적 냉대에 지친 황야의 목소리를 술자리 너머 건너 받기 일쑤다. 입학생의 3분의 1쯤이 전과를 신청하고 그래서 ‘이 황량한 역에서’라는 소설 제목은 우리 시대 인문학 만가(輓歌)의 제목쯤으로나 읊조려진다. 어쩌다 세상은 인문학만을 남겨두고 저만치 떠나버렸는가.
누구를 성토하고 규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우울한 사은회 자리, 그 영탄의 목소리는 이를 뜻할 것이다.
흡수합병이냐 퇴출이냐 하는 절박한 기로에 선 기업 현실, 각박한 경영 현실을 우리 또한 모르는 바 아니다. 아무래도 느슨한 휴머니즘의 인문학 전공자보다는 당장 써먹고 부릴 수 있는 상경계 전공 학생들이 기업경영자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선택되리라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오늘 여전히 대학을 채우고 있는 저 수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을 언제까지 거리로 내몰고 경제동물의 인심 사나운 인간만을 우리 가치관의 전범으로, ‘신지식인’의 전형으로 내세울 수 있을까.
밤이 깊도록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졸업생들이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알지 못할 고성을 내지를 때, 그들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눈길 또한 머물 곳이 없었다. 또 한 차례 고통의 사육제를 마치면서 내년엔 이런 연례행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한기(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