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이 새롭게 외교의 중심가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 대사관이 있는 세종로쪽 덕수궁 옆 자리는 한영(韓英) 수교 2년 뒤인 1884년 영국이 조선에 225파운드를 주고 구입한 땅이다. 옛 배재고 자리에선 러시아 대사관이 신축 건물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캐나다 대사관도 곧 정동길에 터 잡을 예정이며, 미국 대사관은 2008년까지 옛 경기여고 부지에 들어선다는 계획이다. 이쯤 되면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이 아베크족 대신 파란 눈의 외교관들로 북적거리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우리 근대사에서도 정동은 치열한 외교전의 ‘현장’이었다. 대표적 예가 아관파천(俄館播遷).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고종이 1886년 2월11일부터 약 1년간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해 있었던 사건이다. 아관파천은 조선이라는 ‘먹이’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전에서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승리한 결과였다.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외세의 희생양이 되어갔다.
▷요즘 상황이 100여년 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몇몇 학자들은 우리가 100여년 전 그 시절을 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21세기판 조선책략(朝鮮策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당시 청국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조선에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를 권유했듯 지금 한국도 미 일 중 러 등 주변 4강 사이에서 현명하게 처신하면서 강대국들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주문이다. 연세대 김우상 교수는 이런 미래상을 ‘중추적 동반자(pivotal power)관계’라고 부른다.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정동 그 자리’에 문을 열 러시아 대사관은 착공 때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다. 도·감청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자재를 러시아에서 직접 가져왔고 통신 배선 등 사무실 공사도 러시아 기술자들이 직접 맡았다는 것이다. 인근에 들어설 외국 대사관, 특히 미국을 의식한 행동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100여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신경전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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