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 극장가에서 ‘데블스 애드버킷’이라는 미국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악마의 변론인’쯤 될까.
부와 명예를 꿈꾸는 시골뜨기 변호사가 드디어 뉴욕의 대형 법률회사에 입성한다. 그리고 사장으로부터 세뇌를 당해 정의를 외면한 채 오로지 악의 편에서 변론을 함으로써 ‘피묻은 돈’을 긁어모으는 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지극히 사필귀정식인 드라마다. 찰나적 환상에 불과한 경제적 성취, 그리고 법이라는 탈을 쓴 변호사들의 윤리적 타락을 통해 미국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영화다.
무기와 마약 밀매, 테러 등 파렴치한 범죄를 법의 이름으로 지켜주고 대변해 준다고 해서 영화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 같지만 여기에 쓰인 ‘데블스 애드버킷’이란 말의 뜻은 이 단어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15세기 초 교황 레오 10세 때의 일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인(聖人)으로 천거된 사람을 대상으로 혹독한 검증과정을 갖는데 이때 후보자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불리한 사례들을 끌어내 제시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데블스 애드버킷’이다. 악의에 찬 시각으로 흡사 후보자의 껍질을 벗긴 후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찾아낼 듯 악마처럼 달라붙는 역할을 한다. 악마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기준으로 해부되고 평가되기 전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가톨릭의 엄격함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요즘 들어 이 말은 ‘논쟁을 할 때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때로는 일부러 반대되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을 칭하기도 한다. 비록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만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그 역할이 필수적이고 긍정적이란 점에서 ‘악마의 변론인’은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언론의 자유를 바로 이 ‘악마의 변론인’에 비유했다. ‘부패하거나 탄압적인 정부에 대한 방지책으로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필수적인 시대가 사라지기를 희망한다’는 말로 시작된 이 책의 제2장,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서 밀은 민주사회라면 서있는 입장에 따라 심지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하고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말을 포함해 어떤 주장도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조차 ‘악마의 변론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사회의 언론이 ‘악마의 변론인’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닐 듯하다.
문제는 악마의 변론은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반발이나 거부감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옹달샘의 수온은 사시사철 거의 변화가 없지만 손을 담그는 시점에 따라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차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논리다. 대개의 경우 정권 초창기 ‘승리의 관용’이 지배하는 분위기에서는 언론의 혹독한 비판도 ‘악마의 변론’ 정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 대중과의 밀월이 끝나고 지지율이 하락할 때쯤이면 ‘악마의 변론’은 그야말로 정권에 대한 악마의 저주와 조롱으로 여겨질 수 있다.
만일 물의 온도가 철에 따라 달라지는 샘처럼 가치판단의 기준이 수시로 변하는 언론이 있다면, 정부와의 갈등에서 그 언론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 같은 언론의 책임을 전제로 말하건대 정부가 언론과 갈등을 빚게 된 사안들에 대해 비판이 잘못됐다는 확신이 있고, 또 언론을 ‘악마의 변론인’이라는 긍정적 존재로 여겼다면 좀 더 인내를 보였어야 했다. “더 이상 어떻게 참으란 말이냐”고 할 바로 그 시점에서 성인 후보자와 ‘악마의 변론인’간의 관계를 생각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끝까지 인내해야 그 후보자가 사후의 영예인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처럼 정부가 ‘악마의 변론’을 참아내야만 정권을 물린 후에도 영예로운 평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 갈등의 결과로서 ‘악마의 변론인’이 사라지거나 혹은 그 역할이 포기 또는 위축된다면 우리 사회는 진실을 검증하는 중요한 수단을 잃게 된다. 비판의 과정이 생략된 정부의 정책은 실책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국민을 향한 설득력도 얻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규민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