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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ing칼럼]1920년대 평양의 백선행

입력 | 2001-02-19 15:52:00


1920년대 평양에서는 백과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의 동요와 강연과 설교 자리에서 어김없이 백과부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1928년 그녀가 죽자 온 나라 사람들이 사회장을 치뤄 그녀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였다. 그녀는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았던가?

백과부는 16세에 청상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지고 양볼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데다가 천성이 근면하였다.

그녀는 채소를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뜨물 찌꺼기를 거두어 돼지를 길렀으며 누에를 치고 무명베를 짰다. 그녀는 밤과 낮, 여름과 겨울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였다.

집에 온 손님이 냉면 찌꺼기를 남기면 "여보시 거 아깝지 안씀마"라고 서슴없이 꾸짖고 자기가 거두어 먹었다.

이렇게 근검 절약하였다.

돈이 조금 모이면 헝겊으로 돌돌 말아 버선목에 지르기도 하고 허리춤에 간수하기도 하였으며 돈의 덩치가 커지면 이불 속에 감추어 두거나 삿자리를 들추고 바닥에 깔아 보관하였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여느 자산가들처럼 땅을 샀다. 그녀는 중개업자들에 속아 모래땅을 비싸게 샀다.

그런데 여기의 모래가 시멘트 원료로 밝혀져 비싼 값으로 되팔았다.

또 중개업자의 속임수로 황무지를 시가보다 10배를 더 주고 샀다. 이 땅도 시멘트 원료의 생산지가 되어 산값보다 백 배를 받고 되팔았다. 그녀가 땅을 사면서 속은 것은 문자를 모르는 무식쟁이인 탓이었으나 하늘은 그녀에게 행운을 내렸던 것이다.

그녀는 숫자를 쓸 줄 몰라 수수깡에 손톱 자국을 내서 표시할 정도였다.

그녀는 졸부가 아니었고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공덕(功德)을 베풀었다. 그녀는 대동군 솔외마을에 다리가 없어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말을 듣고 서울 수표교를 본떠 돌다리를 놓아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다리를 백과부다리라 불렀다.

이때부터 그녀의 눈부신 선행(善行)이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뒤에 자기 재산을 몽땅 털어 사회봉사 기금으로 내놓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조만식 오윤선 등 지사들은 조선인 집회장소로 쓸 공회당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대동문 옆에 석조로 3층 건물을 지어 조선인 집회장소로 활용하였다. 지금도 이 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런 뒤 광성소학교와 숭현여학교에 많은 재산을 기부하였다. 그녀의 손길은 빈민구제에서 학교 재단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 표창을 하려 하자 "내 할 일 내가 했다"는 말로 거절하여 민족의식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만년에 조만식 오윤선과 서기일을 보던 최경림에게 재산 관리를 맡기고 양자 안일성에게는 생계를 겨우 꾸릴 정도의 재산만을 떼어 주었다.

이 재산은 독립자금으로도 돌려졌다. 불교도인 그녀가 죽자 기독교도들도 나서 사회장을 치뤘고 학생들이 영구를 이끌었다.

그의 이름도 착한 일을 하였다는 뜻을 따 백과부에서 백선행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글/이이화(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