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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구닥다리 사랑, 그게 더 특별한

입력 | 2000-12-13 13:28:00


은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영화 속에서 웃기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직성이 풀렸던 박중훈은 생전 처음 '아무 연기도 하지 않는' 보통 사람이 됐고,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까지 오랜 망설임을 겪었던 송윤아는 드디어 욕심나는 영화와 만났다.

이 영화로 데뷔전을 치른 심광진 감독에게는 영화 제목처럼 '불후의 명작' 같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불타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세 사람의 도전은 '낮은 포복'으로 이 영화에 차분히 스며들어 있다.

은 말하자면 '영화에 관한 영화'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대부분 영화계 종사자들. 개중엔 메인 스트림에서 활동하는 진짜 영화인도 있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영화계 언저리에서만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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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박중훈)는 에로영화계에서 같은 3류 에로영화를 만들고 여경(송윤아)은 대필작가로 남의 글을 대신 써준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벌어질 일은 '영화 밖' 두 배우의 결심처럼 '새로운 도전'이다. 두 사람은 진짜 영화인이 되어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를 가다듬는다. 함께 시나리오를 쓰며 감칠 맛 나는 우정을 쌓아가는 두 사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우정'일 따름이다.

은 아무 것도 연기하지 않는 연기를 지향했던 것처럼 아무 장르도 아닌 장르를 지향한다. 멜로도, 코미디도, 액션도 아닌...무위(無爲)의 장르. 그래서 의 감독 지망생 인기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여경은 우정을 사랑으로 변환시키는 데 더디다.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는 것, 의 슬픈 라스트를 기억한다는 것.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 맞는 '닭살 커플'인데도 두 사람은 사랑을 드러내지 않고 일에만 몰두한다.

그들이 몰두하는 일이란 불후의 명작 같은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이다. 인기와 여경이 함께 만들어 가는 시나리오는 동춘 서커스단 스타인 반달과 반달이 사랑하는 선배 서커스 배우, 반달을 사랑하는 피에로의 슬픈 사랑을 담은 멜로 영화다.

인기는 자신을 피에로에 대입시켜 바라보는데 여경은 그렇지 못하다. 그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이건 감독님 시나리오예요"라고 낮게 읊조린다.

실제로 영화는 두 사람이 써내려 가는 시나리오처럼 애꿎은 삼각관계를 배치해놓았다. 인기는 여경을 좋아하는데 여경은 인기 대신 인기의 선배 감독을 사랑한다. 인기는 결국 '피에로'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은 결과적으로 슬픈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서글픈 감정 역시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몇 가지 코드, 바나나 우유와 산골짜기 어둠을 밝히는 반딧불을 통해 오래 전 잊혀진 줄 알았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희망'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참 착한 영화지만 시거나 맵거나 짜거나 뭔가 화끈한 맛을 원하는 관객들에겐 별 매력을 주지 못할 영화. 감독은 인터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때묻지 않은 순수를 간직한 인기와 여경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감정이입이 어렵다. 두 사람이 너무 좋다고 자화자찬하는 영화 속 시나리오도 솔직히 전혀 새롭지 않다. 노래도 구닥다리다. 함중아의 70년대 히트곡 '내게도 사랑이', 온 국민의 애창 가곡 '그 집 앞' 등, 영화 전편에 흐르는 올드 뮤직은 너무 구닥다리인 나머지 촌스럽게 느껴진다.

다만 두 배우의 예쁜 척 잘난 척 하지 않는 연기, 에서 제니퍼 코넬리가 선보였던 발레 장면을 패러디한 신, 그 신에 흐르던 음악 '아마폴라'를 차용한 점 등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은 블록버스터 몇 편이 극장가를 재편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현실에서 드물게 신선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의 '극단적인 순수'에 쉽게 동화될 수 있을 듯하다.

황희연 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