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을 태운 비행기의 출발을 지연시켰던 평양의 안개가 눈물로 변한 것일까. 30일 오후 평양 고려호텔에서 반세기 만에 북녘 가족을 만난 남측 방문단 100명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50년전 결혼사진 보며 오열▼
○…“반갑소. 혼자 애들 키우느라….”
‘1·4후퇴’ 때 대동강 다리가 끊겨 가족과 생이별했던 명용덕(明用德·83)씨는 북에서 두 자녀를 홀로 키운 아내 이덕실씨(78)의 손을 부여잡고 말을 잊지 못했다. 헤어질 당시 29세였던 젊은 아내는 주름살이 깊은 할머니가 돼 있었고 12세, 8세이던 딸 영숙씨(61)와 아들 영근씨(57)도 중년을 훌쩍 넘겼다. 명씨는 품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19세 새신랑 명씨와 14세 수줍은 신부 이씨의 결혼사진이었다. 명씨는 이씨에게 “당신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사진을 꺼내보곤 했다”며 “신문 등에서 부서진 대동강 철교 사진을 볼 때마다 애들이 보고 싶어 많이 울었다”며 다시 오열했다.
○…남측 방문단 100명 중 가장 많은 9명의 북녘 가족이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던 양철영(楊澈泳·81)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양씨는 부인 우순애씨(73)와 함께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같은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다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종교 탄압이 심한 데다 ‘6·25전쟁’까지 터지자 51년 월남하던 중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양씨는 남쪽에서도 교회장로가 돼 신앙생활을 계속하다 지금의 부인과 재혼했다. 양씨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며 북녘 아내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내 우씨는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맙다”며 눈물을 삼켰다.
○…1차 이산가족 상봉 때 109세 노모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듣고 실신했던 장이윤(張二允)씨에게 방북 기회를 양보했던 우원형(禹元亨·65)씨는 옥희(64·여) 인형씨(61) 등 2명의 동생을 만났다.
옥희씨는 “오빠가 살아있는 줄 몰랐어”라며 흐느꼈고 우씨는 그런 동생을 한참 동안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우씨가 사전 생사확인에서 ‘미상’으로 나온 막내동생의 생사를 묻자 동생 인형씨는 “그애는 이미 죽었고 밑으로 다른 동생이 4명 더 있다”고 말했다.
우씨는 “젊은 시절 동생들이 보고 싶으면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무작정 ‘우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전화를 건 적도 많다”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동생이 3명일 것이라고 생각해 3개씩 준비한 오리털잠바 금반지 시계 등을 선물했다. 그는 “1차 상봉 때 장이윤씨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흐뭇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며 “나도 이제 소원 풀었다”고 말했다.
▼南화가-北시인 감격의 포옹▼
○…서양화가 김한씨(72)는 92년 김일성상까지 받은 북한의 공훈시인인 동생 김철씨(67)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함북 성진(지금의 김책시)에 살았던 이들 형제는 ‘6·25전쟁’이 터지자 동생은 인민군에 지원하고 형은 북으로 올라간 국군에 합류했다가 ‘1·4후퇴’때 남으로 내려오면서 헤어졌다. 형 김씨는 전쟁이 끝난 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부모를 찾았지만 동생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김씨는 몇 년 전에야 한 재미교포를 통해 동생의 편지와 사진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 때는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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