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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of the week] 삶을 노래하는 Edith Piaf

입력 | 2000-11-16 10:50:00


◆ 노래에 살아 숨쉬는 그녀를 찾아서

Le ciel bleu sur nous peut s'effrondrer
Et la terre peut bien s'écrouler.
Peu m'importe si tu m'aimes.
Je me fous du monde entier.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 Edith Piaf의 'L'Hymne A L'Amour' 중 -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누구라도 한번씩 자신만의 사랑 경험을 떠올리며 회상에 빠진다. 짝사랑과 첫사랑의 그대, 혹은 현재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향해. 약간 잡음이 섞인듯한 낡은 옛날 LP 같은 음질의 앨범은 제작된 지 오래됨을 말하지만, 아름다운 노래는 우리를 아련한 추억으로 초대한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노래를 감상하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노래에 삶을 담아 온몸으로 노래하는 프랑스의 빌리 할러데이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검은 드레스에 파리한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열정적인 힘은 그녀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미 세상을 등진 그녀의 존재를 잊을 만도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앨범이 발매돼 눈길을 끈다. 빨간색이 강렬한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 그 안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자그마한 여인이 서 있다. 누가 봐도 그녀는 Edith Piaf임을 짐작할 수 있다. 2장의 CD에 그녀의 노래들로 가득한 이 앨범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후 12년간의 노래를 수록했다. 가수로서 최고의 역량을 갖고 힘있는 목소리를 구사하던 Edith Piaf의 최고 곡들만을 엄선해 놓은 [La Vie En Rose].

◇ 'La Mome Piaf'가 되기까지

Edith Piaf(본명: Edith Giovanna Gassion)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의 베르빌에서 태어났다. 서커스 단원이던 아버지와 카페에서 노래했던 어머니는 그녀를 낳자마자 거리에 내버렸다. 그렇게 그녀의 삶은 시작됐다. 숱한 고생으로 6살에 잠시 시력을 잃었던 그녀는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동냥으로 목숨을 유지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노래하던 그녀는 10살때부터 직업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만이 그녀가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는 돌파구였고 그 순간만이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전전하는 그녀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고작 프랑스의 국가 'La Marseillaise' 가 전부. 이렇게 살아가던 그녀가 10대의 출산 경험을 가졌던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가 찾아들었다. 1935년, 프랑스의 작은 술집 'Gerny'의 주인이었던 루이 루프레(Louis Leplee)가 길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본 것. 그는 당시 20살이던 그녀를 가게에 데려와 노래할 수 있게 했고, 온갖 풍파에 시달린 삶이 배어나는 그녀의 노래 실력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La Mome Piaf'('The Kid Sparrow-작은 참새'라는 뜻)로 불리는 열정적인 가수로 알려지기 시작,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작곡가 레이몽 아소(Ramond Asso)와 모리스 슈바리에(Maurice Chevalier)의 도움으로 그녀의 삶이 다듬어진 노래로 표현되면서, 거칠고 굴곡 많은 그녀의 인생이 예술로 승화됐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뇌에 찬 목소리의 그녀는 서서히 샹송계의 스타가 돼갔다.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그녀를 발굴해 키워준 Louis Leplee가 살해되면서 Piaf는 잠시 시련에 빠졌으나 프랑스 국민가수로서 자리잡으면서 주변국가들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 L'amour, L'amour

2차 세계 대전(1939~1945) 즈음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활동 영역을 미국 대륙으로 넓혔다. Piaf는 1940년대 초반 당시 신인이었던 이브 몽땅(Yve Montand)이 오프닝을 장식했던 공연의 히로인이었으며, 1946년 프랑스 가수로는 이례적으로 워싱턴에서 공연, 미국 투어공연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노래하던 그녀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 생겼다. 미국에서 만난 권투선수 마셀 셀당(Marcel Cerdan)과 1948년 결혼하게 된 것. 이로써 그녀는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됐으며 '진실한 사랑'을 체험했다.

그는 그녀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절망의 쓰라림에서 그녀의 몸과 영혼을 구해줬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Cerdan은 이듬해 그녀를 뒤로한 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그녀는 짧은 사랑을 나누고 미리 간 그에게 바치기 위해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를 만들었다. 이 애절한 러브송은 그녀가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가수라는 평을 들을 만큼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 곡은 이후 몇 장의 앨범에 영어로 실리기도 했으며, 우리 나라의 음악 교과서에 실릴만큼 유명한 곡이다.) 그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없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한 그녀는 술과 마약을 도피처로 삼기 시작했다.

◇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 - Written By Edith Piaf

J'irais voler la fortune Si tu me le demandais...
Je renierais ma patrie.
Je renierais mes amis Si tu me le demandais...
On peut bien rire de moi,
Je ferais n'importe quoi Si tu me le demandais...
Si un jour, la vie t'arrache à moi, Si tu meurs, que tu sois loin de moi,
Peu m'importe, si tu m'aimes Car moi, je mourrai aussi...
Nous aurons pour nous l'éternité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é.
Dans le ciel, plus de problè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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