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History Of Ten Years... and More
90년대 영국 음악계의 새로운 활력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블러(Blur)가 10여 년의 음악 생활의 중간 점검에 들어선다. 다름 아니라 그들 최초의 베스트 앨범의 발매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 곧 발표할 베스트 앨범은 신곡 'Music Is My Rader'를 수록한다. 그러나 밴드 자신들이 정작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발표 시기는 아직 시기 상조이지만) 앞으로 발표할 새 앨범일 것이다. 그 심정은 블러의 팬들 역시 마찬가질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베스트 앨범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얼마간 소원했던 블러라는 존재를 환기시켜준다는 것이다.
1999년 말 Q 매거진 음악 시상식에서 라디오헤드(Radiohead), 알이엠(R.E.M), 유투(U2), 오아시스(Oasis)를 제치고 최우수 아티스트로 선정됐고, 2000년 벽두에는 NME 시상식으로부터 최우수 밴드로 선정됐지만 브릿 팝(사실상 블러는 이 한정적인 용어를 극히 거부한다)의 열혈 지지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사람들의 청각은 아메리카 대륙의 하드코어/핌프 록에 예민해져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90년대 영국 음악의 부흥기를 이뤄낸 선구자답게 블러는 적잖은 음악적 기후의 변화 속에서도 그들 특유의 세련되고 여유로운 자태를 여전히 지켜오고 있다. 행여 블러가 이번 베스트 앨범을 통해 그러한 면모는 말끔히 지워버리고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 황급히 서두르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제까지 여섯 개의 앨범을 발표하는 동안 우리가 보아온 블러의 이미지는 현명함이다. 물론 [Blur](97)나 [13](99)는 적잖이 당황스런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 속에서 너무 서둘러 흐릿해지고 얼룩진 그들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신념은 다음 앨범에서도 여전할 것이라 우리에게 또 다른 신념을 낳게 한다. 어쩌면 이제 블러는 숱한 브릿 팝 밴드들 가운데서 낡은 밴드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차세대 밴드보다도 변화에 변화를 뚜렷하게 거듭해 온 밴드가 바로 블러라는 점을 감안할 때 결코 결코 블러를 브릿 팝 밴드로서의 자의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식상한 밴드라고 낙인할 수 없다.
사실상 블러는 태생부터 결코 식상한 밴드가 아니었다. 뉴 웨이브의 침체기를 겪고 있던 영국 록 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은 다름 아닌 블러였기 때문. 영국 음악의 전통에 새로운 감각을 덧입힌 사운드로 주류로 떠오른 이들은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 이후 세대에 속하는 모드족의 후예답게 증폭된 기타 사운드를 통해 사이키델릭한 기타 팝 사운드로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인디 댄스 팝 크로스오버 지대에 출중한 밴드로 급성장했다. 브릿 팝의 실체를 세계에 드러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블러다.
분명 이들은 킨크스(The Kinks), 스몰 페이스(The Small Faces), 후 (The Who), 잼(The Jam), 매드니스(Madness), 그리고 스미쓰(The Smiths)의 뒤를 이어 전세대를 계승하고 있지만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었고 그 사이에 전세대에 통하는 문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울타리가 단단하게 굳을 수 있었던 것은 초창기 시절은 아니다. 블러가 처음 영국 음악 씬에서 두각을 나타날 때 그들은 인디 댄스 팝 크로스오버 지대에 서있는 이들로 평가됐다.
일반적으로 브릿팝이 동시대의 얼터너티브와 달리 팝에 대해 관대했던 것처럼 블러 역시 데뷔작 [Leisure]에서 다분히 팝적인 사운드를 들려줬다. 데뷔작의 첫 싱글 'She's So High'가 차트 50위권 내에 진입했을 때 일각에서는 이들을 짜맞춰낸 틴 아이돌 스타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러는 영국의 중산층 출신들이었고 외모도 그에 걸맞게 말끔했던 것. 그러나 이들은 점차적으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두 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에서 'Pop Scene'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사운드는 이전에 그들이 보여준 그 어떤 곡보다도 강렬했으며 네오 모드족다웠다. 그리고 이는 보다 친숙하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보된 성장과 무관하게 'Pop Scene'은 1992년 당시 브릿 팝과 얼터너티브/그런지, 그 어느 쪽 기후에도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 앨범은 미국 진출을 위해 특별히 'Chemical World'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환대받지 못했다.
그러나 [Modern Life Is Rubbish]는 이후 블러가 보여주게 되는 음악적 변화의 기점이 되는 앨범이다. 이는 이후 발매된, 블러 최대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Parklife](94)에서 잘 나타난다. 영국에서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한 이 앨범의 막대한 성공은 블러 앞에 수식해도 무방했던 인디 밴드로서의 꼬리표를 떼어버리게 만들었으며, 브릿 어워드에서 4개 부문의 트로피를 거머쥐게 만들었다. 바로 이 앨범이야 말로 브리티시 부흥을 이끌어 낸 그 주인공인 것이다.
영국의 대중매체가 마치 이성을 잃어버린 듯 마구잡이식으로 블러와 오아시스를 라이벌 구도하에 대립시킨 것도 이 앨범의 성공이 불러낸 것이다. '제 2의 브리티시 인베이젼'의 가장 쓸만한, 유력한 탄약은 바로 블러와 오아시스였던 것. 그 누구도 블러와 오아시스가 90년대 가장 사랑받고 가장 명성을 얻은 영국 밴드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블러를 얘기하는 데는 항상 끝없는 레일처럼 오아시스가 평행한다. 이러한 대결 구도에 무관심한 블러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삼파전 양상으로 발전시키려는 기미도 없이 언론의 과열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1995년 블러가 네 번째 앨범 [The Great Escape]를 발표할 당시 때마침 오아시스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발매했으니 싸움 붙이기에는 최고의 시기였던 것. 결과는 블러의 참패로 끝나버렸다. [The Great Escape]는 평론가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릿 팝에 길들여지길 원치 않는 블러의 새로운 시도는 팬들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했던 것. 게다가 오아시스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통해 미국에서 성공을 거둬냈던 것과 달리 이 앨범은 미국 진출에 또 다시 불행을 겪음으로서 [The Great Escape]는 그 가치에 비해 팬들로부터 더욱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오아시스와의 비교에 넌더리가 난 블러는 2년 가까이 칩거해 새 앨범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들이 97년 셀프 타이틀을 붙인 앨범 [Blur]를 들고 나타났을 때, 그것은 블러의 팬들을 적잖이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한 데이먼 알반은 더 이상 브리티시 뮤직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으며, 미국의 인디 록에 매혹됐다고 표명했다. 이전에 보여줬던 세련된 도시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스스로 팝 밴드라 자칭할 만큼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찾을 수 없는 [Blur]는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일렉트로닉적인 사운드까지 겸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 전체적인 분위기는 단연 산란하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 가득한 얼터너티브 사운드였다. 'Theme From Retrob', 'Death Of A Party'는 밝고 경쾌한 이미지를 벗어 던진 흔적이 더욱 농후한 곡들. 'You're So Great'는 로우파이에 대한 이들의 관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다. 또한 'Chinese Bombs'는 섹스 피스톨스 풍의 직설적인 펑크 사운드를 띠고 있으며, 'I'm Just a Killer for Your Love'는 일렉트로닉적인 사운드를 변용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 뒷자락에 자리한, 너나바(Nirvana)의 영향을 짙게 느낄 수 있는 'Movin' On'이나 소닉 유스(Sonic Youth)의 난해함이 가득한 'Essex Dogs'만큼 이들의 파격적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은 없다.
이렇게 브릿 팝 씬에서 완연히 벗어난 블러의 또 다른 도전은 영국 내에서는 그다지 따스한 시선을 얻지 못했지만 그와 달리 'Song 2'를 위시한 이 앨범은 블러에게 미국에서의 성공을 안겨줬다. 그러나 블러의 음악적 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해 초 발표한 여섯번째 앨범 '13'은, 녹음시 사용했던 창고같은 스튜디오의 번호를 타이틀로 삼을 만큼 여전히 여유로운 그들의 태도가 담겨있음과 동시에 일레트로닉과의 만남을 이뤄내고 있다.
데뷔작에서부터 함께 했던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가 아닌 최근 가장 유력한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로 군림하고 있는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과 함께 작업한 것. '13'은 'Blur'의 연장선 상에서 더욱 어둡고 혼탁한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으며, 로우 파이에 대한 여전한 관심은 인디 록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13'은 스스로를 일정한 카테고리에 묶어내려는 완고함이 아닌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관대함이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대함은 일곱번째 앨범이 되는 차기작에서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블러와 오아시스의 대결 구도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블러와 오아시스, 그리고 스웨이드(Suede), 버브(The Verve) 등이 일궈낸 브릿팝 무브먼트도 90년대 말엽에는 이미 그 매너리즘에 빠져 들었고 그 뒤를 이어 주목을 끈 새로운 물결들 - 애쉬(Ash), 수퍼그래스(Supergrass), 스테레오포닉스(Stereophonics), 특히 쿨라 셰이커(Kula Shaker)와 맨선(Mansun) 등 - 도 이제는 괄목할 만한 충격을 선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상 블러를 향해 "스웨이드보다 못한 밴드"라고 서슴없이 공격을 가하던 오아시스도 최근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가 미국 시장에서 쓴잔을 마셔야 하는 난세에 접어들지 않았는가.
라디오헤드가 비상업적 노선에서 변신을 꾀한 것처럼 오아시스는 물론 이제 블러에게 중요한 것은 브릿팝의 대선배로서 현재 록씬에 어떻게 자리 굳히기를 마무리 짓느냐에 있다. 틴 아이돌 스타들이 차트 정상을 오르내리고, 장르를 뛰어넘는 희귀 사운드가 활개를 치는 세상에 이들은 브릿팝의 생존전략에 더욱 골몰해야 하는 직면에 이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블러가 자신들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원기를 충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 베스트 앨범이 레코드사측의 상업적인 전략의 하나일 수 있으나 적어도 팬들에게는 그 의미가 충분히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조은미 jamogue@tube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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