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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찜쪄먹기]인터넷 시대의 인간상 뉴로맨서

입력 | 2000-09-15 10:34:00


◇해커와 인공지능의 대결

다국적 기업이 구축한 컴퓨터 정보통신망이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가까운 미래사회. 전자공학과 신경생리학의 결합이 활발하게 이뤄져 사람들은 신체의 일부를 변형시키거나 인공 기관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주인공 케이스는 자유자재로 정보 네트워크에 침투할 수 있는 유능한 해커다. 그는 ‘컴퓨터 카우보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데이터를 훔쳐내려다 발각된 뒤, 몸 안의 신경계에 손상을 입은 채 쫓겨나고 만다. 사이버스페이스로 접속하려면 신경계를 통해 뇌에 전극을 연결해야 하는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일본에서 약물에 취해 자포자기한 나날을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날 아미티지라는 정체불명의 의뢰인이 나타난다. 그는 신경을 회복시켜 줄테니 대신 예전의 해킹 실력을 발휘해달라고 요청한다.

케이스는 그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신경회복 수술을 하면서 케이스의 몸 안에 시한장치가 내장된 독극물 주머니를 심어놓는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주머니가 녹아버리는 것이다. 케이스는 늦기 전에 해독제를 얻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일에 뛰어든다.

수수께끼의 의뢰인과 몰리라는 여성이 케이스의 파트너가 된다. 몰리는 두 눈에 특수렌즈를 꿰매 붙이고 손톱 아래에는 칼날을 봉합해 넣은 보디가드로서 냉혹한 청부살인업자이다. 또 한때 케이스의 스승이었던 전설적인 해커 딕시 플래트라인도 일행에 합류한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전자유령’이다.

일행은 지구 상공에 떠있는 거대한 스페이스콜로니로 갔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한편 그 와중에 케이스는 정체불명인 의뢰자의 배후에 다국적기업의 인공지능 컴퓨터인 윈터뮤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가 의뢰받은 일은 다름 아닌 윈터뮤트의 본거지로 침투하는 일이었다.

이후 스페이스콜로니와 북미대륙, 그밖에 세계 각처를 돌며 숨가쁜 침투와 해킹 활동이 벌어진다. 케이스 일행은 서로의 감각기관과 신경망을 연결해 타인의 눈과 귀를 자신의 것처럼 활용하며 고도의 해킹 전술을 구사한다.

마침내 윈터뮤트의 중심부에 도달한 케이스. 그는 그곳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접하게 된다. 윈터뮤트를 접한 케이스는 윈터뮤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의아해한다. 윈터뮤트는 일종의 정신적 인격체와 결합해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일이 끝난 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케이스. 어느 순간 숙소 단말기의 모니터에 윈터뮤트가 나타나더니 케이스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제 윈터뮤트는 ‘모든 것의 전체이자 총합체인 매트릭스’가 됐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인터뮤트는 같은 동아리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윈터뮤트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에 전파망원경으로 수신된 우주 신호의 일부는 켄타우르스 항성계의 외계 지성이 보낸 통신문이었다. 윈터뮤트는 이제 자신이 우주의 초월적인 존재 중의 하나가 됐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케이스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이버펑크 시대 연 조용한 사색가 윌리엄 깁슨

▲윌리엄 깁슨

깁슨은 1948년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살 즈음이던 1968년에 월남전 징집을 거부하며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깁슨은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이후 변변한 직업 없이 지내면서 독서와 습작에 몰두했다. 깁슨이 즐겨 읽은 것은 토마스 핀천이나 윌리엄 버로우즈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J.G.발라드 같은 뉴웨이브 SF 물이었다고 한다.

데뷔작은 1977년에 발표된 ‘홀로그램 장미의 파편’이라는 단편이다. 그 뒤 단편들을 계속 내놓다가 1984년 첫번째 장편소설 뉴로맨서를 출간했다. 바로 이 작품으로 깁슨은 SF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휴고상과 네뷸러상 장편 부문을 동시에 석권했다. 일약 혜성처럼 떠오르게 된 것이다.

깁슨은 그 뒤 ‘카운트 제로’와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로 이어지는 두편의 장편을 더 발표해 이른바 ‘사이버펑크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버추얼 라이트’, ‘아이도루’ 등의 장편을 냈다. 또한 사이버펑크 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논객이 된 브루스 스털링과 공저로 ‘디퍼런스 엔진’이란 장편을 집필하기도 했다.

깁슨의 초기 단편들에는 뉴로맨서와 같은 배경과 등장인물이 나오는 경우가 여럿 있다. 이 시기(1983년 이전)의 작품들은 ‘불타는 크롬’이란 제목의 작품집으로 묶여져 발간됐다. 이 책에는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코드명 J’의 원작인 ‘조니 니모닉’도 수록돼 있다.

사이버펑크의 원조라는 유명세에 비해 깁슨 자신은 작품만을 이따금 발표하며 조용히 활동하는 편이다. 흥미로운 일화 한 가지. 깁슨이 뉴로맨서를 쓸 당시엔 PC 사용법을 전혀 몰랐다고 하는데, 새삼 SF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사이언스픽션(www.scifi.com) 웹사이트나 야후검색을 통해 인터넷에서 그의 강연이라든가 인터뷰 등을 몇가지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깁슨의 장편으로는 뉴로맨서가 유일하다. 그 외에는 몇몇 단편이 번역됐을 뿐이다.

◇‘진부한 미래와는 이제는 안녕!’

깁슨의 동료 작가인 브루스 스털링은 뉴로맨서를 읽은 뒤 이처럼 인상적인 평을 내렸다. 구태의연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던 기존의 SF들과는 전혀 달랐다는 말이다.

어떤 문학작품 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깁슨의 뉴로맨서는 그런 드문 영광을 누리며 오늘날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1984년에 처음 발표된 이 장편소설은,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컴퓨터 정보통신망(인터넷)과 그 환경에서 파생된 온갖 용어들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사이버펑크(컴퓨터 청년문화), 사이버스페이스, 가상현실, 매트릭스(컴퓨터 네트워크), 아이스(컴퓨터 보안시스템)가 그 예다.

물론 이 용어들이 전부 다 뉴로맨서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과 관련된 정서와 감성은 뉴로맨서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컴퓨터 정보사회가 낳을 새로운 사회상과 감수성을 예리하게 전망했던 것이다. 단순한 전망이 아니라 일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숱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온갖 SF소설이며 영화, 또 관련 문화들은 어떤 의미에선 모두 뉴로맨서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뉴로맨서가 이처럼 단기간 내에 유명해진 것은 전자공학의 발달과 PC의 대중적 보급,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에 결정적으로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는 그 어떤 SF작가도 컴퓨터 정보사회의 근미래상을 이처럼 생생하게 예견하지 못했다. 물론 하드웨어적인 묘사는 더러 볼 수 있었지만,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서적 감수성 변화를 설득력있는 캐릭터로 형상화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한편 뉴로맨서(Neuromancer)가 화제작으로 떠오르면서, 그 제목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해석들을 낳았다. 신경(neuro)+몽상가(romancer)라는 의미는 달리 보자면 ‘새로운 소설’(new romance)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마법사(necromancer)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마 깁슨 자신도 이러한 중의적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박상준(SF 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