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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석연/공무원 예산낭비 책임 추궁을

입력 | 1998-10-14 19:10:00


현행 ‘회계관계직원 등의 책임에 관한 법률’(회책법)에는 회계관계직원을 포함한 일정 범주의 공무원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법령이나 예산이 정한 바에 위반하여 국가 등의 재산에 대해 손해를 끼친 때에는 그 손해를 변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회책법 운용기준’(감사원 예규 115호) 제5조에는 △예산의 낭비 △예산의 변태지출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 사이의 거래에 있어 물품을 고가로 구입한 경우 △타인에게 맡긴 국가소유 물품이 망실 훼손된 경우 등에는 국가에 손해를 끼친 때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무원이 국가예산을 고의 또는 중과실로 축내거나 유용해도 뇌물 등의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공무원에게 더이상 변상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 감사원예규 문제 많아 ▼

그동안 이같은 감사원 예규에 의해 예산을 낭비하고 유용한 공무원들이 가벼운 주의 촉구 등을 받는 선에서 면책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감사원은 96년11월 경기 의왕시장이던 S씨가 의왕세계연극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5억6천만원의 예산을 낭비한 사실을 적발했다.

의왕시장은 당시 연극제 관련시설을 도시계획법상 건축이 불가능한 그린벨트 내에 설치하기로 계획하고 설계용역 등을 발주하였으나 결국 그린벨트가 해제되지 않아 설계대금 5억6천만원만 낭비한 채 사업이 중단됐다는 것.

그러나 감사원은 의왕시장에 대해 엄정주의 촉구토록 하는 처분 이외에는 무모한 사업추진으로 예산을 낭비한 점에 대해서는 더이상 변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선에서 감사를 마쳤다(동아일보 98년10월11일자 14면 보도).

만일 공무원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예산을 변태지출하거나 낭비한 행위를 국가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보지않는 이론과 판례가 있다면 이는 헌법정신에 비춰볼 때 국가권위주의 사상에 사로잡힌 낡은 이론으로서 국민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제는 ‘회책법’을 비롯한 다른 법률 어디에도 공무원이 부담해야 할 손해의 개념이나 범위에 대해 정하거나 하위법령에 위임한 규정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령도 아닌 행정규칙에 지나지 않는 감사원 예규는 회계관계직원 등 공무원의 면책범위를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있다.또 예규내용을 살펴보면 예산을 변태지출하거나 낭비한 공직자 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다.

감사원 예규는 헌법상 포괄적 위임입법금지 원칙, 법치행정의 원칙 등에 위배될 뿐더러 혈세를 낭비한 공무원을 면책시킴으로써 결국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예산의 낭비 등에 대한 광범위한 면책규정은 업적 위주의 선심행정을 조장하고 공직자의 책임의식 해이를 가져와 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가중시키게 된다. 감사원 예규가 헌법재판의 암흑기인 5공 초기(82년9월)에 제정되어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감사원은 당연히 위헌의 소지가 다분한 예규를 개정하거나 폐지해야 한다. ▼ 국민소송법 제정할 때 ▼

아울러 공무원의 면책규정을 법률(회책법)에 규정함과 동시에 예산을 낭비하거나 유용한 공무원의 면책범위를 대폭 축소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공직자의 기강을 확립하고 특히 선거로 뽑는 지방자치단체장의 무분별한 선심행정에 제동을 걸어 책임행정의 풍토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체의 임직원이 정책을 집행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의나 중과실로 국가 예산에 손해를 끼쳤을 경우 국민이 직접 해당 공무원에게 배상책임을 묻는 이른바 ‘국민대표소송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공무원의 잘못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에 대한 국가의 구상권 행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이는 정의와 형평의 관념에 반할 뿐만 아니라 책임행정의 구현에도 지장을 초래한다.

의왕시 사례의 경우 감사원이 의왕시에 더 무거운 책임을 묻게 해달라며 의왕시의 한 시민단체가 소송을 걸었으나 법원은 “시민단체는 이같은 형태의 소송을 낼 자격이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따라서 국민대표소송의 핵심은 일정수의 국민 또는 단체가 공무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에 의한 국고손실에 대하여 기관장 또는 법무부장관에게 일정기간내에 그 책임을 추궁하도록 권고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시민단체가 국가를 대신하여 소송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석연(변호사·경실련상임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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