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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박정훈/어느 가장의 죽음

입력 | 1998-01-19 20:58:00


K제화 생산부 차장 신동선(申東善·44·서울 성동구)씨가 호주머니에 감춰두었던 극약을 꺼내든 것은 18일 오후. 아내 전모씨(41)가 교회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비운 사이였다. 신씨는 자신이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 이유를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 절친한 회사동료들에게까지도…. 지난해 12월 말 K제화에서는 사원들을 대상으로 ‘명절맞이 상품권 판매대회’가 열렸다. 생산부에 근무하던 신씨는 영업부 사원과 달리 부담은 적었지만 창업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회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판매에 나섰다. 때마침 한 거래처로부터 1천장의 상품권 주문을 받았다. 10여년간 거래를 해온 곳이라 대금 6천7백만원을 어음으로 받았다. 평소 말수가 적은 신씨는 자신이 올린 실적에 대해 주변사람에게 단 한마디의 공치사(功致辭)도 늘어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씨의 죽음은 모두에게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신씨가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은 14일 오전. 거래처에 안부전화를 걸었다가 뜻밖의 부도 소식을 듣게되면서부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래처에서도 상품권을 할인판매해 자금난을 해결해보려는 계획으로 상품권을 주문한 것이었다. 어음은 이미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린 뒤였다. 신씨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갈등만 신씨를 휘감고 있었다. 며칠 뒤 신씨는 약국에 들러 약병 2개를 샀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평소 자신의 말 수만큼이나 짧은 인사말이었다. ‘사랑하는 엄마, 부디 못난 남편을 용서해 주길 바래.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야, 아빠 몫까지 엄마와 누나를 잘 돌봐다오.’ 〈박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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