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당선자에겐 「통일전문가」라는 수식이 관용어(慣用語)처럼 따라 다닌다. 통일논의 자체가 금기시되던 70년대에 일찌감치 4대국안보론과 3단계통일론을 선구적으로 제창한 이래 그는 어느 정치인보다 진지하게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지난 14대 대선에서 패배, 정계에서 일시 물러나 있는 동안 그는 한반도의 평화정착방안과 통일문제 연구를 표방하는 아태평화재단을 창립하고 이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는 『경제와 통일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적극적으로 남북문제와 통일에 관한 정책을 제시했었다. 이런 행보가 김당선자의 승인(勝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계량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통일 분야에 있어 상당한 식견과 소신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강하게 심어준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정권에서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당선자는 19일 차기대통령으로서 첫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한 특사를 교환해 남북기본합의서 실천방안을 논의할 것을 북한측에 제안한다』며 『필요하다면 김정일(金正日)총비서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당선 일성(一聲)은 많은 사람들에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기대를 다시 한번 갖게 한다. 그러나 그가 떠맡을 남북관계의 현실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 예속된 경제난 만큼이나 어지럽다. 남북문제는 94년 북한의 핵위기 이후 단순히 민족 내부의 문제만이 아닌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성격이 전변했다. 그만큼 복잡해졌다는 얘기다. ▼ 그동안 「주도권」 못잡아 ▼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대북경수로 제공과 4자회담, 국제사회의 대북(對北)지원 등으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 주변 열강의 발언권과 입김은 지난 몇년 사이 부쩍 강화됐다. 이 와중에서 북한이 생존을 위해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에만 치중하고 한국과의 대화를 일절 거부하는 바람에 한국은 좀처럼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잡기 어려웠었다. 게다가 최근의 경제위기 때문에 한국은 경제력의 우위에 입각한 압박식 대북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기 어려워진 요인도 발생했다. 이같은 상황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을 요구한다. 특히 북한의 현실과 장래를 정확히 진단하고 이에 맞춘 처방을 적절히 내놓는게 중요하다. 김당선자는 이 점에서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는 거의 대조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북한을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하며 『북한이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고 말하는 등 북한의 붕괴를 기정사실화 해 왔다. 또 북한이 우리의 요구대로 당국간 대화에 응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보일 때만 정부 차원의 대규모 대북지원이 가능하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왔다. ▼ 대남선동 열 올릴수도 ▼ 이에 비해 김당선자는 북한이 붕괴하기 보다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결국은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갈 것으로 전망한다. 북한에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교류 협력의 강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추운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북한으로 하여금 옷을 벗게 한다는 「햇볕론자」인 셈이다. 북한을 포용해야 한다는 김당선자의 지론은 논리적인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실천에 있어선 면밀하고 다차원적인 원려(遠慮)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김당선자는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북대화는 상대가 있는 만큼 우리가 아무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북한이 응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다. 북한이 경제난에 빠진 한국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대화 대신에 오히려 대남선동과 교란에 열을 올릴 우려도 있다. 한반도에서 최대한의 실리를 챙기는 게 목적인 주변국가들이 아무 대가 없이 단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통일에 협조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보수와 진보 사이 스펙트럼의 폭이 크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 도출이 간단치 않다. 이는 김당선자 자신이 지난 시절 용공음해와 북풍에 끝없이 시달리며 뼈저리게 절감한 대목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통일문제를 통치권 차원에서 독점, 정략적으로 이용하다 번번이 낭패를 본 일 또한 타산지석의 교훈이다. 다행히도 김당선자 시대의 남북관계는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북한은 한국의 대선후 처음 열린 22일 베이징 남북적십자접촉에서 한국의 새정부 출범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북한은 이에 앞서 21일 한국의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사실을 보도할 때 김당선자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비난도 하지 않았다. ▼ 현정권 전철 밟지말아야 ▼ 이는 북한이 지난 14대 대선 때 선거 3일 뒤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한 사실을 밝히면서 선거결과가 『미국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새 정권은 6공의 연장』이라고 비난했던 것과 대비된다. 김당선자는 뚜렷한 통일관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만큼 화해와 대북제재 사이를 오락가락한 현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고 일관된 대북정책을 펼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 1년 안에 이산가족의 재회 및 편지왕래 실현과 같은 선거공약이나 정상회담 개최와 같은 목표에 집착해 너무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남북관계는 점차 개선될 확률이 높다.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엔 한계가 있는만큼 북한은 부득이 한국과의 협력을 통한 공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당선자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경제난 등 다른 시급한 국정현안을 해결해 나가면서 대북정책을 추진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과거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7.4 공동성명」으로,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고향방문단 실현」으로,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각각 남북관계에 있어 무지개빛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김영삼대통령도 김일성(金日成)의 급사로 무산되긴 했지만 남북정상회담 합의로 한때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했던 꿈은 모두 허망한 백일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 김당선자가 해야 할 일은 꿈이 아니라 「꿈같은 현실」을 겨레 앞에 내놓는 일이다. 20세기에 냉전논리에 따라 이뤄진 분단을 넘어 남북이 하나되는 한반도의 21세기를 여는 역사적 책임은 이제 그의 어깨 위에 무겁게 놓여 있다. 〈한기흥기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