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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균동감독의 「죽이는 이야기」

입력 | 1997-12-24 08:07:00


예술이 생산자만의 것이었을 때 그 이름은 예술이 아니었다. 삶 자체나 놀이 같은 뭐 그런거 였으리라. 예술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을 때 예술은 항상 다른 누군가의 소유였다. 귀족이나 왕이나 교회 같은…. 이제 「상품」이 된 예술은 드디어 특정인으로 부터 해방됐지만 대신 개성을 잃어버리고 다수의 눈치나 살피는 초라한 처지가 돼버렸다. 처음부터 대량 복제의 대중 예술로 태어난 영화에는 떼어버릴 수 없는 낙인이 찍혀있다. 영화 감독은 저마다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멀리는 관객에서 부터 가까이는 제작자와 배우 스태프까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현실을 거부하거나 이용하면서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든지 아니면 무너져간다. 「한국 영화의 게릴라」 여균동 감독의 신작 「죽이는 이야기」는 영화 감독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주인공 구이도 감독(문성근 분)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찍고 싶어한다. 소재는 여관의 종업원이 얼굴도 모르는 여자 손님을 좋아하게 된다는 내용. 여관과 섹스가 나온다는 말에 제작자는 흔쾌히 돈을 대기로 한다. 그러나 이 기회에 비련의 주인공으로 변신하고 싶은 에로 배우 말희(황신혜 분)와 누아르 영화에서 멋진 액션 연기를 원하는 하비(이경영 분) 때문에 작품은 꼬이기 시작한다. 여감독은 의식을 감추고 웃음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배우와 감독 각자가 꿈꾸는 영화를 흑백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미션 임파서블」 「시네마 천국」 등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을 패러디한 장면들이 그렇다. 말장난은 유치해지기 전에 칼을 거두고, 배우들의 코믹 연기도 여러가지 장치 덕분에 삼류를 벗어난다. 속물들의 속된 이야기라는 「낮은 목소리」로 세상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감독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여감독은 『이 영화는 꼭 영화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각자의 욕망이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는 현실을 그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속 구이도 감독이 그랬듯이 여감독 역시 비틀린 권력과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손쉬운 (그리고 제작자와 대중을 유혹하는) 수단으로 섹스와 여관을 이용한다. 당연히 영화는 관객을 빠져들게 하기보다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상징과 의미를 즐기기보다 무의식적 몰입을 원하는 「대중」들이 이런 다른 차원을 얼마나 환영할지는 미지수다. 내년 1월1일 개봉. 〈신연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