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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수필]이능숙/「실업자 엄마」의 행복

입력 | 1997-08-29 08:15:00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나면 시간에 쫓기어 1백m 달리기라도 하듯 뛰어서 출근하곤 했다. 바쁠 때는 화장도 직장에서 하고 퇴근하면서 슈퍼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가지고 오는가 하면 세탁기 돌리기와 도시락 설거지 그리고 집안청소까지 동시동작으로 해야 했다. 낮에는 직장업무로 바쁘고 밤에는 주부로서 쫓기니 항상 자정이 넘어서야 일이 마무리되어 한숨 돌리곤 했다. 일요일이면 집안행사에다 결혼식장 순례 등 참석해야 할 일이 많았고 집에서 쉰다 한들 아침 점심 저녁에 간식까지 챙기느라 피곤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무리하다가 링거를 꽂고 몸져 누웠던 때도 있었고 갈수록 체력은 줄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경기가 불황이다 보니 내가 다니던 직장이 적자 누적으로 폐쇄되는 바람에 갑자기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하는 게 아닌가. 수입이 줄어드니 우선 큰아이 과외부터 끊고 서점에 들러서 책을 사다가 직접 뒤떨어진 과목을 가르쳤다. 아이가 탁구를 하고 싶다고 해서 한두 시간씩 탁구장에 들러 함께 땀을 흘리기도 했다. 여름방학 동안에는 아이들과 함께 중앙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너무 덥기도 하고 텔레비전에만 빠지는 것 같아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몇십년만에 하는 농구인데도 슛을 쏘니 제법 잘 들어가 재미도 있었다. 내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하루는 큰아이가 『엄마, 요즘 들어 엄마와 제가 많이 가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어요』 했다. 큰아이의 얘기를 듣고서야 그동안 대화보다는 명령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실업자가 되어서 비록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졌다지만 그동안 못다했던 사랑을 가족들에게 가득 부어주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이능숙(인천 남동구 간석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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