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李韓烈(이한열)군의 장례식이 열린 87년 7월9일. 1백만명의 시민이 서울 연세대 앞에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연도를 가득 메운채 이군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이날 오후2시경 시민 학생들을 향해 경찰의 최루탄이 쏟아졌고 모두들 씁쓸한 기분으로 일터와 가정 학교로 돌아갔다. 그것은 全斗煥(전두환)정권의 대국민 항복을 받아낸 6월항쟁의 대미(大尾)였다. 그러나 6월항쟁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6월항쟁은 노동 통일 시민 문화 등 우리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왔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변화의 물결이 닥친 것은 경제개발논리에 밀려 수십년간 원천봉쇄 당해온 노동운동. 6.29선언 1주일 후 울산 현대엔진의 민주노조 설립으로 불붙은 근로자들의 투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9월 초순까지 2개월 동안 전국에서 1백26만여명의 근로자가 「민주노조 쟁취, 생존권 확보」를 외치며 쟁의를 벌였다. 분규발생 사업장만도 3천3백11곳. 직장마다 노조결성 움직임이 본격화해 6월항쟁 이전에 2천6백여개였던 노동조합이 수개월만에 4천1백개로 급증했다. 이후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노동계는 올해초 사상 초유의 총파업까지 벌였다. 5.16 쿠데타 이후 지속돼온 노사관행은 일대 변혁기에 돌입했고 90년대 중반까지 고임금 인상 행진이 이어졌다. 6월항쟁이 마련해준 「열린 공간」을 바탕으로 근로자들의 제몫찾기가 본격화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반독재 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함께 모였던 사회 각 분야의 시민들은 이후 환경 경제 여성 법률 교육 문화 등 제분야에서 다양한 조직들을 엮어내 본격적인 시민운동 시대를 열었다. 6월항쟁 이전 일부 관변단체를 제외하면 손으로 꼽을 정도였던 시민단체는 97년 현재 5천여개로 늘어났다. 89년 출범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금융실명제 등 경제민주화 정책을 이끌어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환경분야에서는 88년 공해추방운동연합(93년 환경운동연합으로 개칭), 89년 환경과 공해연구회 등이 잇따라 발족돼 90년대 환경중시의 시대를 열었다. 6월항쟁 당시 전경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계도 전국적인 단체를 잇따라 조직,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등 여권을 신장시켜나갔다. 가톨릭농민회 등 종교단체가 주축을 이뤄온 농민운동도 점차 자생적인 조직화를 이뤄 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6월항쟁은 오랜 독재체제 아래서 갈구했던 「금단의 열매」에 대한 갈증을 풀어줬다. 동시에 그 열매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한 환상이 깨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월항쟁 이전까지 유보됐던 서로 다른 사회계층간 이해관계가 극명히 노출됐고 탈(脫)정치화와 퇴폐향락주의, 중산층의 보수화도 심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이 한국전쟁이후 우리사회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변화의 대부분이 사회발전에 긍정적이었다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기홍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