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2년 귀순해 성형수술까지 받으면서 낯선 남한생활에 발붙이려고 몸부림쳐온 李韓永(이한영)씨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나이 서른 여섯에, 그것도 괴한들의 총격으로 사경을 헤매다 기구한 생을 마감한 그는 또 하나 분단현실의 피해자였다. 그의 죽음은 한 귀순자의 단순한 죽음이 아닌 정부와 공안당국, 국민 모두에게 대공(對共)대비태세의 재정비를 촉구하는 경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무엇보다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공안당국에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말할 것도 없이 당국은 귀순자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느 북한주민이 생명을 걸고 남쪽으로의 귀순이나 망명을 감행하겠는가. 더욱이 이씨의 경우는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던 사람이다.이씨는 지난해 金正日(김정일)의 전처이자 이모인 成蕙琳(성혜림)의 망명사건 때 얼굴이 처음 알려진 뒤 김정일의 사생활을 폭로, 북한의 보복표적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그의 얼굴을 끝까지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기왕 공개된 마당에는 특별한 보호조치를 했어야 옳았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데는 이씨 자신의 책임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당국의 책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관할 경찰서조차 이씨의 관내 거주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이씨에 대한 총격테러가 비록 북한측 소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국의 보호조치 미흡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은 일단 북한측의 보복테러로 추정하고 있으나 사생활로 인한 범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수사가 복잡한 양상이다. 어쨌든 사건발생 10여일이 지나도록 사건의 성격은 물론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초동수사의 잘못이 크다. 사건 당시는 북한 노동당 황장엽(황장엽)비서의 망명으로 북한의 보복에 대비한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주민들의 빠른 신고에도 경찰은 꾸물거리다 범인을 놓쳐버리고 단서가 될 만한 증거물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수사의 기본이 안된 어이없는 일이었다. 안기부 기무사 요원들이 파견돼 공조수사가 시작됐으나 공조는 말뿐 서로 공명심에 사로잡혀 독자적인 수사에 몰두했다. 안기부는 용의자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화면과 지문이 찍힌 은행 입금표를 확보한지 나흘만에 경찰에 넘겨주었다. 누가 수사주체이고 누가 협력기관인지 알 수가 없다. 안기부 등은 나름의 전문성과 정보를 적절한 시기에 경찰에 제공, 수사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 상식이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다면 소를 계속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유사사건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이씨의 죽음은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