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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곁으로” 출옥후에도 中향한 최양옥 지사

“동지들 곁으로” 출옥후에도 中향한 최양옥 지사

Posted December. 14, 2019 08:12,   

Updated December. 14, 201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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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9년 4월 22일자 2면에 공명단 사건의 주역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2면 전체를 할애해 소개된 대대적인 보도였다.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서울 교외 망우리 인근에서 일제의 우편물 수송차와 승합차를 습격해 현금을 탈취하고 운전사와 승객들에게 ‘대한독립 공명단 만세’를 세 차례 외치게 했다.

 공명단(共明團)은 1928년 중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다. 비행사 안창남을 비롯해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옥고를 치른 신덕영 최양옥 등이 설립했다.

 최양옥(1893∼1983)은 공명단의 단장이었다. 강원 횡성 출신인 그는 서울의 중동중학교에서 공부하다 3·1운동을 맞았다.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낙향한 그는 4월 1일 횡성 장날에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해 체포됐다가 탈출한다.

 이후 최양옥은 공명단 단원 김정련 이선구와 함께 다시 국내에 잠입했다.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비행학교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우편차 습격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 일제 경찰은 총동원됐다. 최양옥이 붙잡혔던 순간을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범인은 불의에 경찰의 습격으로 피착은 되었으나 그대로 태연자약하여 포승에 얼키어 문 밖을 나가서는 그를 둘러싼 신문기자들에게 향하여 ‘기자로서 해외에 공명단이라는 유력한 단체의 존재를 모르고 공명의 명자를 울명자로 잘못 게재하였다’는 것을 소리쳐 성명하고 경찰의 호위 속에 종로서로 향하였다.”

 최양옥 지사는 징역 10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그를 만난 박순업 횡성문화원장은 “선생은 옥고를 치르다 출옥한 뒤 ‘동지가 필요하다’는 중국에서의 연락을 받고는 가족의 눈물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이국땅으로 향했던 분”이라면서 “최양옥 지사를 비롯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로 인해 횡성은 애국의 고장으로 불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지영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