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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차 시중

Posted April. 08, 2003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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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차() 시중이었다. 한 초등학교 교장을 자살로 몰고 간 사건의 시작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었다. 기간제 여교사에 대한 차 시중 요구가 하루에 그쳤는지, 매일 지속적이었는지는 학교 및 유족측과 여교사 및 전교조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교권 전교조 등 특수상황을 떼 놓고 보면, 사안의 핵심은 직장에서 여성에게 차 시중을 요구하는 측이 있었고 여성은 이를 거부한 뒤 부당한 억압을 받았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직장여성의 차 시중이라는, 고학력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늘어나면서 시작된 사회적 심리적 갈등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젊은 직장여성들의 불만은 나도 당당한 사회인인데 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 시중을 해야 하느냐로 모아진다. 자존심 상할뿐더러, 사소한 일만 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에서 점점 멀어져 능력계발 및 경력관리에 해가 된다는 얘기다. 용감한 여성은 불의에 항의하며 장렬히 사표를 던지고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대체로 황당하다는 거다. 공식적으로야 이해한다고 해도, 비공식적으로는 차 대접한다고 손목이 부러지느냐 등의 험한 소리도 한다. 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꽃 같은 낭자가 떠주는 것을 먹는 게 낫다는 전통적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은 탓이다.

여성학 석사학위를 받고 여성신문사 편집국장과 여성포털사이트 대표를 역임한 김효선씨는 당당하고 진실하게 여자의 이름으로 성공하라는 긴 이름의 저서에서 사소한 데 목숨 걸지 말라는 전략을 제시한다. 커피와 생존을 바꾸지 말라는 거다. 차 시중을 거부하는 것이 당장 정치적으로는 옳을지 모르나 실익은 없다. 인심 잃고 심하면 직장까지 잃을 수 있는 PC(Politically Correct)페미니즘의 함정에 빠진다. 지금 차 심부름 한다고 해서 천년만년 할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할 기회가 올 것이니 멀리, 길게 보는 게 낫다는 설명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팔팔한 직장여성은 이해 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뇌신경과학과 사회생물학의 발달은 안타깝게도 페미니즘이 인간 본성의 과학과는 정반대임을 밝혀내고 있다. 여성으로 길러지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우열과 상관없이 남녀는 그냥 다르다는 것이다. 남성은 일중심적이고 여성은 관계중심적이라는 것이 한 예다. 직장이라는 정글 속 생존의 법칙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이 진정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가 아닌가 싶다.

김 순 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