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와카미야 전아사히신문 주필을 기리며

Posted May. 02, 2016 07:31,   

Updated May. 02, 2016 07:44

日本語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을 접하고,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35년간 같은 언론의 길을 걸어오면서 우정을 나눠온 필자로서 믿기지 않는 비보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를 아는 한국의 벗들 역시 커다란 충격과 애석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와카미야 씨는 일생을 칼럼과 논평 등 언론 활동을 통해, 최근에는 연구 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한일관계의 소중함을 역설해 왔고, 한일관계의 안정을 위해 몸을 던져 힘써온 드문 지한파(知韓派) 일본 지식인이었다.

 필자는 그가 아사히신문 입사 후 서울에 첫 유학을 온 1981년부터 사귄 이래 지금까지 언론계와 연구 활동의 같은 길을 걸어오면서 서로를 통하여 한일 관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다. 때로는 서로를 지켜보고 지적하면서 언론을 통해 비치는 양국관계의 현상과 장래를 향해 뜻을 함께하고자 힘써 왔다.

 그가 언론 활동을 통해 한일관계 개선과 발전에 기여해 온 발자취는 크다. 2002년 월드컵 축구 한일 공동개최를 제안한 그의 사설은 실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2005년 아사히신문 칼럼에서 ‘일본이 다케시마(독도)를 한국에 양보해 버리고’라는 논조로 독도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칼럼으로 그는 우익의 협박과 함께 누리꾼 등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언론 활동을 계속하여 그를 아끼는 이들을 감동케 했다.

 그는 일본 정치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개헌 추진 움직임에 단호한 자세로 반대를 표명해 왔다. 아사히신문 주필 때인 2006년 경쟁지 요미우리신문 주필과의 대담에서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반대”의 한목소리를 냈다. 또한 2007년 5월 3일 일본의 제60회 헌법기념일에는 21편의 사설을 8면에 걸쳐 게재하는 획기적인 기획으로 ‘호헌’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와 필자는 2008년 ‘전후 화해와 미디어의 역할’ 도쿄 심포지엄에서 한일 양측의 기조강연을 맡았다. 우리는 미디어가 역사 화해를 위한 평화 추진자일 뿐 화해를 방해하는 ‘화약 운반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논리를 폈다.

 그는 언론계를 떠나 연구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저술과 강연 등을 통하여 한일관계의 밝은 장래를 염원했던 국제파 일본 지식인이었다. 지난해 8월 광복 70년 기념 동아일보의 필자와의 대담에서 그는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일본이 평화국가의 간판을 스스로 내리고 전쟁에 휘말리는 게 아닌가, 불안감을 갖게 하네요”라며 일본의 장래를 걱정했다.

 이번에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날 서울에서 필자와 오찬을 함께하면서 “최근에 ‘일소(日蘇) 국교 정상화 70년’ 관련 저술을 탈고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력적인 연구, 강연, 국제회의 참석 및 저술 활동에서 쌓인 스트레스로 여윈 표정이었다. 이는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는 한국 문화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두텁다. 가수 조용필로부터 ‘한오백년’을 배운 뒤 한일 교류의 자리 때마다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대단한 열창으로, 정확한 한국어 발음에 구성진 가락으로 한국의 벗들을 감동시키곤 했다.

 장수 시대에 68세의 짧은 생애는 너무 아깝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한일관계 발전을 향한 발자취는 매우 큰 그림자로 우리 가슴에 남는다.

 와카미야 형, 편히 잠드소서….

정 구 종 동서대 석좌교수·전 동아일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