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익명이 집필하는 국정교과서

Posted October. 26, 2015 11:36,   

ENGLISH

1996년 국정으로는 마지막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펼쳐보니 집필진 9명의 이름이 똑똑히 기재돼 있다. 1974년 최초의 국정 국사 교과서가 발행된 이후 국정이라고 해서 집필진을 밝히지 않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지난 23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거부하면 명단 공개를 할 수 없다고 말해 논란이 되고 있다.

국사교과서 국정화가 바람직한 해법은 아니지만 정부가 밀어붙이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나 집필진을 알 수 없는 국정 교과서만은 절대 안 된다. 국정 교과서도 집필진이 양심에 따라 쓰는 것이다. 집필진 공개는 국정화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장치다. 유신 시절 국정 국사교과서에는 유신을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당시 근현대사를 집필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그런 내용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을 쓴 것은 익명 뒤에 숨은 국가다. 국정화를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발언이 고육지책()임을 모르지 않는다. 국정화 발표 직후 일부 대학과 학회를 중심으로 역사학 교수들의 집필 거부 선언이 잇따랐다. 집필을 부탁받지도 않았는데 집필 거부라니 우습다. 집필을 거부한 학자 중에 지금까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면 따돌리겠다는 위협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구보다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교수들이 해선 안 될 유치한 행동이다.

국정화로 간다면 실제 집필진 명단이 공개되지 않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발상이 나왔다는 자체가 일정 부분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쓸 수 없는 역사라면 아예 쓰지를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식인 사회만 놓고 보면 국정화에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다. 찬반이 비등했던 일반인의 반대도 찬성보다 많아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정화를 최종적으로 못 박기 전에 다시 한번 국정화 여부를 깊이 고민해보기 바란다.

송 평 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