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실을 폐쇄해 브리핑룸으로 전환하고 정부부처 사무실 방문 취재를 제한하며 취재에 응한 공무원은 반드시 상부에 보고하라.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국정홍보처의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의 내용처럼 보이지만 이는 2003년 3월 14일 이창동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발표한 홍보업무 운영방안의 주요 골자다. 언론에 관한 한 내가 노무현 대통령의 분신이라고 말했던 이 장관이 대통령의 언론관을 그대로 반영해 만든 언론 옥죄기의 첫 시도였다.
4년 반이 흐른 지금 이 발언은 고스란히 현실화됐다. 소위 개혁입법이라는 신문법 제정, 공정거래위원회를 동원한 비판신문 압박, 언론중재위원회와 법적 소송을 통한 언론계 편 가르기에 맞춰졌던 초기의 반언론정책은 더욱 거칠어져 이젠 기자실에 대못질을 함으로써 언론자유의 본질인 취재와 보도의 자유까지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최근의 막무가내 식 언론정책은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의 흐름을 주도한다 언론은 불량식품 등 막말을 쏟아내며 언론 흠집내기에 주력해 온 노 대통령식 언론 탄압의 결정판이자 건전한 비판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폐쇄적 언론관의 극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잘못된 언론정책을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념과 매체에 관계없이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정부 방침에 항거하는 이유는 정권이 공격하는 것처럼 기득권 지키기가 아니다. 정부의 방침을 수용하거나 방치할 경우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가 심각하게 훼손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편협하고 왜곡된 언론관의 실태와 문제점,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진 각종 부작용 등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공보실입니다. A 국장 면담 신청을 하셨다면서요?
본보 B 기자는 최근 재정경제부의 A 국장을 만나기 위해 비서에게 전화로 면담 신청을 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공보실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로 A 국장을 만나려고 하시는 거죠? 면담을 하려면 사전에 공보실을 통해야 합니다.
B 기자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면담 신청을 받은 비서가 바로 공보실로 기자가 A 국장을 만나려고 한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취재원 접촉 사전 신고=정부가 다음 달 1일부터 시행할 예정인 이른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벌써 기자의 취재 통로를 제한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정부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시행하기에 앞서 근거 규정으로 취재지원에 관한 기준(안)을 총리 훈령으로 만들었다. 세계에서 언론의 대()정부 취재 방식을 명문화해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 독소 조항은 제3장에 규정된 취재 응대 항목이다.
훈령은 공무원의 대면() 취재는 브리핑룸이나 지정된 접견실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기자가 사무실에서 공무원을 만날 경우는 취재 목적과 취재원을 사전에 공보실에 신고해야 한다. 훈령은 또 기자와 통화를 하거나 만난 공무원은 사후에 그 사실을 공보실에 통보토록 규정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정부는 기자가 언제, 누구를, 왜, 얼마 동안 만났는지를 각 부처 공보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빅 브러더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조지 오웰의 1984년식 통제와 흡사하다. 결국 공무원은 기자 접촉을 기피할 수밖에 없고, 만나더라도 정부 정책에 대한 솔직한 소견을 밝히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기자들이 자유롭게 공무원을 만나 의혹이 있는 사안에 대해 충실한 정보를 제공받아 기사화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국민을 대신해 정부가 제대로 일하는지, 부정 비리는 없는지 감시해야 하는 언론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내놓는 걸러진 목소리만 듣고 기사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된다.
기사송고실 통폐합 이유는=최근 외교통상부 보건복지부 등 정부 각 부처는 기자들이 기사 작성과 취재 활동을 위해 머물러 온 기사송고실을 폐쇄하고 기자들에게 통합브리핑룸으로 옮기라고 다그치고 있다. 그러나 통합브리핑룸은 현재 서울 과천 대전에 각 1개씩 있을 뿐이며, 이곳에서 정부 각 부처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들을 현장 취재하고 마감시간에 맞춰 신속히 기사를 송고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에 가깝다.
1985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사건 비리, 정부 정책의 문제점 등이 각 부처와 검찰 경찰 등의 청사에 새벽부터 밤늦도록 진을 친 채 피 말리는 취재 경쟁을 통해 뉴스를 추적하는 기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정부의 직접 여론 통제=정부는 이처럼 언론 취재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면서도 KTV 인력 증원 등 관영 매체를 통한 정부 홍보 보도는 극대화하려 애를 쓰고 있다.
정부는 지난주 방안에 따라 KTV 인력 등 홍보처 정원을 10%가량 늘리는 직제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관제 보도를 더욱 늘려 정보의 생산유통여론 반영 과정을 모두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출입처 제도의 개선은 언론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고, 정부가 언론 자유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순간 언론 자유는 망가지기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기자들 반발 더욱 확산=정부의 일방적인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 추진에 대해 연일 반대 성명이 이어지는 등 기자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한국기자협회 소속 39개 서울지역 언론사 기자협회 지회장들은 23일 정부의 일방적인 기사송고실 통폐합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가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라는 이유로 기자가 공무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통제하겠다는 것은 비민주적인 일로, 5공식 언론 통제를 연상케 한다며 기사송고실은 해당 부처의 건물에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정부가 끝내 기사송고실 통폐합 조치를 강행할 경우 유관 언론단체는 물론 시민사회단체 등과 연대해 강력히 저항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노동부 건설교통부 보건복지부 과학기술부 경찰 출입기자들도 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