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도장은 개개인의 인격과 신분, 그리고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도장을 맡긴다는 것은 전폭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고, 돈은 빌려 줘도 도장은 빌려 주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관청에는 관인()이 있고 회사에는 직인()이 있다. 관청의 인허가와 회사간의 거래는 도장이 있어야 비로소 효력을 지닌다. 도장은 사람간의 신의와 열 마디 약속보다 더 효력을 갖는 귀물()이다.
나라에도 국가의 권위와 통치권자를 상징하는 도장, 즉 국새()가 있다. 옥 또는 금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옥새() 또는 금보()라고 하지만 흔히 옥새로 통칭한다. 중국에서는 수명어천기수영창(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목숨이 영원히 번창하리로다)을 새긴 진시황의 옥새가, 우리나라에서는 예왕()의 예왕지인()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왕조가 교체될 때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옥새를 받아야 비로소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도장의 주권을 빼앗겼던 셈이다.
우리가 자주적으로 옥새를 만든 것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이후였다. 모양도 제후를 상징하는 거북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꾸었다. 한일병합 후 일본이 옥새 8점을 빼앗아 도쿄()로 가져갔고, 광복 후 맥아더 원수를 통해 반환했으나 625전쟁 와중에 전부 분실했다가 용케 3점을 되찾았다. 건국 후에는 한자 전서체로 된 (대한민국지새)에 이어 1963년 한글 전서체로 된 은제 대한민국 국새를 만들었고,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해 훈민정음체로 대한민국 넉 자를 새긴 봉황 모양의 금제 국새를 새로 만들어 1999년 2월부터 사용해 오고 있다.
엊그제 중앙선관위는 민주당 법적 공천권자를 논의한 끝에 중앙당 직인과 대표 직인을 가져간 추미애 의원측에 맞서 신속하게 직인 변경 등록을 마친 조순형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도장으로 당권을 지킨 조 대표는 마치 철종 임금 승하() 후 재빨리 옥새를 차지한 뒤 전광석화()처럼 고종을 낙점한 조대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도장 찍는다는 말이 또한 결별을 의미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자칫 옥새가 조 대표의 옥쇄()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