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학기초에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이 충격 때문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상담을 하기 위해 필자를 찾아왔다. 그는 국내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이곳 대학원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유학 온 수재였다.
그 학생이 들은 첫 수업은 미국인 교수의 강좌소개였다. 내용인즉 시험은 없고 학기말 성적은 리포트로 대체하고, 주제는 임의로 정하며, 리포트 분량 역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 수재의 질문이었다. 스스로 생각해서 하라는 주문이지. 예? 그는 심지어 수학 문제까지도 달달 외웠다고 한다. 떠서 입에 넣어 주는 과외공부로 수석 입학하고 대학원생에게 과외지도를 받아 졸업도 수석으로 한 인물이었다. 그 날 그 백면서생이 필자에게 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필자는 우리가 선진국의 진입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할 때면 으레 그 수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날 우리는 중단 없는 전진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상명하복과 획일성을 요구받는 군대식 교육에다 타고난 성실함과 몇 날 몇 밤을 꼬박 새울 수 있는 근면성 때문에 꿈 같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젠 인재상도 바뀔 때가 됐다. 자율과 창의성이 우선이다. 물론 선진국형 인재 육성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인재를 육성하려면 우선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국내 교육의 특징은 주입식, 암기식, 그리고 사지선다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침이 주어지지 않거나 사지선다형이 아니면 문제를 풀지 못하는 인재를 양산해 내는 교육 시스템은 이제 대폭 바뀌어야 한다. 이런 교육으로 21세기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할 수는 없다.
비단 교육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기업문화와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 보았던 어떤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다. 평생을 감옥에서 살다가 가석방돼 슈퍼마켓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노인의 이야기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허락을 구하러 오는 이 노인에게 매니저는 참다못해 알아서 좀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 날 밤 침대에 누운 노인은 지시가 없으면 오줌도 나오지 않는 인간이 되었구나라고 자조하며 자살을 생각한다. 타율에 얽매여 자율적 사고를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자율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는 창의력 발휘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토양이다.
필자가 사장을 맡고 있는 회사는 국내외 투자 유치를 위해 21세기형 사업 아이디어를 만드는 회사이다. 그래서 창의적 기업문화의 창달에 모든 것을 맞추는 모험을 하고 있다. 조직 설계는 아메바식이다. 연봉제 보상을 위한 평가 기준은 창의력 발휘 여부에 초점을 두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전 임직원 목표관리제를 도입하였고 출퇴근과 출장은 자율에 맡겼다. 품의제도보다는 브레인스토밍을 통한 집단 의사결정 제도를 주로 활용한다.
자율성과 창의력을 개발하기 위한 교육과 기업문화의 혁신은 기업의 사활뿐만 아니라 국가 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다. 우리 모두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매진할 때이다.
남충희( 센텀시티(주)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