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여전히 불편한 이야기가 있다. 1948년에 발표된 셜리 잭슨의 단편 ‘제비뽑기’는 그러한 소설이다. 누군가에게 행운이 아니라 끔찍한 불행을 안겨주는 이야기라서 더욱.
소설에 나오는 마을에서는 매년 6월 어느 날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인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들이 모이는 것은 희생양을 뽑기 위해서다. 그래야 농사도 잘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 탓이다. 그들은 하나씩 제비뽑기를 한다. 미리 표시된 용지를 뽑은 사람이 희생자가 되어 돌에 맞아 죽는다. 올해는 모임에 늦게 참석한 여자가 뽑혔다. 아이들의 엄마고 누군가의 아내다. 사람들은 울부짖는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어떤 여자는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큰 돌을 집어 든다. 아이들도 폭력에 가세한다.
끔찍한 내용이다. 잭슨이 이 소설을 ‘뉴요커’에 발표했을 때 난리가 난 것은 그래서였다. 수백 통의 편지가 쏟아졌고 잡지사 전화는 불이 났다. 작가의 어머니마저 편지로 싫다고 말했다. “네 아버지와 나는 ‘뉴요커’에 실린 네 소설이 아주 못마땅하다.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을 쓰는 게 어떠니?” 부모마저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불편한 소설이었다.
이제는 미국 최고의 단편소설이 되었지만 아직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왜 불편할까. 우리 안에 있는 뭔가를 건드리는 탓이다. 소설에서처럼 죄가 없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돌을 던지는 일은 지금도 드문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 야만성과 폭력성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일종의 얼어붙은 바다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카프카의 말처럼 “우리 안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얼음송곳”이어야 하는지 모른다. 구멍이 뚫리고 균열이 나야 우리 안의 모순이나 야만성이 보일 테니까. 그래야 잘못된 히스테리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니까. 잭슨의 끔찍하고 으스스한 알레고리 소설이 야기하는 불편함이 소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