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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와 화랑의 탄생

Posted March. 09, 2021 07:19   

Updated March. 09, 202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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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도군에 소재한 운문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현재는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운문승가대학이 자리 잡고 있어 웅장하면서도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운문사는 오랜 세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시대에 이곳에는 5개의 사찰이 포진해 있었는데,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내린 가실사가 그중 하나이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것이다. 왕건은 운문사 북방 문경-진위-청송 지역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여러 번 혈전을 벌였다. 이때 후방의 운문사 세력이 왕건을 지원했던 것 같다.

 고려말기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발발한 곳도 이곳이고, 한말 의병항쟁기에는 최세윤 의진의 지역분대가 운문사에 설치되었다. 1908년 권병호 부대도 운문산에 잠복해서 활약했다. 운문사가 위치한 가지산은 경주-울산에서 대구-경산 지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 권역을 연결하는 요지이면서 가파른 산들이 첩첩이 놓여 있어 방어전이나 게릴라 활동에 대단히 유리한 지형을 제공한다.

 원광의 세속오계에 ‘임전무퇴’가 들어 있는 것이 전에는 그저 귀산과 추항이 화랑, 무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곳 지형을 보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이 전쟁의 시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이곳은 신라의 전진기지가 될 수도, 최후 방어선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원광이 이곳에 머무르고 이곳에서 화랑도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화랑도는 신라의 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임전무퇴’라는 계율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진짜 기능은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정치체제의 외연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성공 후에 화랑도는 제거된다. 이유는 둘 중 하나다. 화랑도가 초심을 잃었거나, 신라의 진골세력이 화랑도를 내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교훈은 같다. 권력자들의 탐욕이 자신들에게 권력을 안겨준 이유를 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권력이라는 바퀴는 언제 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