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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때 좌절 쉰살의 반전

Posted October. 10, 2012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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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신야(50사진) 일본 교토대 교수의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소식에 일본 열도가 들썩이고 있다. 한국 중국과의 영토 문제, 샤프 소니 등 전자업체의 몰락, 국가신용등급 강등 등 어두운 뉴스 일색이던 가운데 오랜만에 굿 뉴스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 등 유력 신문들은 1면부터 시작해 대서특필했다.

야마나카 교수의 노벨상 수상은 잇단 좌절에 이은 반전이라는 점에서 일본 국민을 더욱 흥분시키고 있다.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로 좌절한 국민이 용기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야마나카 교수가 의대로 진학한 것은 아버지의 핀잔 때문이었다. 일본 중소기업의 메카로 불리는 히가시오사카() 시에서 재봉틀 부품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 야마나카 쇼자부로() 씨는 아들에게 너는 사업 소질이 없다며 다른 길을 찾으라고 말했다. 가업 상속이 흔한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학생 때 그의 별명은 부상병동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유도를 배우면서 십여 차례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고베대 의학부로 진학한 야마나카 교수는 1987년 졸업할 때만 해도 정형외과 임상의를 꿈꿨다.

그는 국립 오사카병원 정형외과에서 연수의를 시작하자마자 다시 좌절했다. 도무지 수술에 자신이 없었다. 다른 의사라면 10, 20분에 끝낼 수술에 2시간 동안 진땀을 흘려야 했다. 주사를 놓는 것도 서툴러 치료받았던 아버지가 형편없다고 했을 정도다. 동료들은 그런 그를 수술에 걸림돌이 된다는 의미로 자마()나카라고 불렀다. 성의 뒷글자인 나카 앞에 일본어로 걸림돌이라는 의미의 자마를 붙인 것.

절망한 그는 연구자의 길을 선택했다. 마침 전신 관절이 뒤틀린 중증 류머티즘 환자를 담당해 충격을 받았던 그는 난치병 연구에 매진하기로 했다. 199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글래드스턴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오사카시립대 의학부 약리학교실 조수 자리를 얻은 그는 또 좌절했다. 돈도 토론도 없는 연구실에서 실험용 쥐만 보살피는 일이 주어진 것. 우울증까지 겪었다. 연구를 포기하고 임상의로 돌아가려던 그는 1999년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 조교수직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응모한 뒤 낙점됐다.

과학기술진흥기구 연구비지원 프로그램에 응모했다가 연구주제가 너무 황당하다는 이유로 떨어질 위기에 놓였지만 심사위원장이던 기시모토 다다미쓰() 전 오사카대 총장이 젊은 연구자의 박력이 느껴진다며 그를 구제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교수의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다.

2004년 교토대로 옮긴 그는 올해 3월 교토마라톤에 출전해 풀코스를 완주했다. 부족한 연구비를 채우기 위해 완주를 조건으로 인터넷 성금 모금에 나선 것. 노벨상 수상이 결정된 8일 밤부터 9일 정오까지 난치병 환자 가족 등 187명이 그에게 160만5800엔(약 2280만 원)을 기부했다.

야마나카 교수는 연구실에 젊은 연구자 200여 명이 있지만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수한 인재가 외부로 유출되는 사태가 걱정스러워 앞으로도 계속 마라톤에 출전해 연구비를 충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학시절 나는 칭찬받는 학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뭐든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 아홉 번 실패하지 않으면 한 번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배극인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