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나고야()에서의 탁구 대회
중일 전쟁으로부터 27년 후인 1972년, 일본과 중국 양국은 국교를 맺었다. 전후에도 동서 냉전의 최전선에서 적대시해 온 두 나라였지만, 서로 외교를 전환시켰다. 그러한 결단을 내리게 한 배경은 무엇인가. 베이징()에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을 찾았다.
영하의 길거리를 걸어서, 중심가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 국가 체육 총국 시설을 방문했다. 1960년대에 중국 탁구의 에이스로서 이름을 떨쳤고, 지금은 중국 탁구 협회 주석으로 있는 쉬이인션() 씨를 만났다. 회의실에는 기념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1971년 봄에 나고야()에서 열린, 제31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도 거기에 있었다.
그 대회야말로, 세계정세를 움직인 미국과 중국의 탁구 외교의 출발점이었다.
대회전부터 대회장인 아이치현() 체육관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멀어져 있던 중국이, 6년 만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쉬이() 씨는 감독이었다. 저우언라이() 수상으로부터, 첫 번째 목적은 우호다, 시합은 둘째다고 지시를 받았다며, 쉬이씨는 회상한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중일 우호의 촉매 역할을 떠맡아 일본을 방문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회장의 일각에서는 다른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중국 선수단 간부에게 미국 탁구 협회 임원이 말을 건넸다. (중국은 대회가 끝난 뒤에 캐나다 등의 팀을 초대하는 것 같은데) 미국도 불러 주지 않겠느냐.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하고 있는 적국이었다. 진심에서 하는 소린가라고 반신반의했지만, 간부는 이 말을 베이징() 에 전했다.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런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외무성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진언했고 마오쩌둥도 동의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이면 미국 팀은 귀국한다. 마오쩌둥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처럼 수면제를 마시고 자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수간호사에게 미국 팀을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수간호사는 이전부터 수면제를 마신 후에 내가 한 말은 무시하도록 하라는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명령에도 수간호사가 움직이지 않자, 마오쩌둥은 당황했다. 빨리 알리지 않으면 미국 팀이 돌아가 버린다.
4월 7일, 나고야 발 뉴스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중국 선수단이 미국 팀의 초청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틀 후 미국 팀은 홍콩을 경유해서 베이징()으로 향했다. 키신저-미 대통령 보좌관의 은밀한 베이징 방문은 이로부터 3개월 후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의 방중으로 이어진다.
중일 관계도, 중미 관계도, 나고야가 계기가 되었다고, 쉬이씨는 말한다.
소련•베트남 순회 / 미국과 중국의 의도가 일치
물론,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다. 공통의 이익이 서서히 양국을 서로 가까이 하게 했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으로 중국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탁구 외교의 무대 뒷이야기를 쓴 인민일보() 해외 판의 부 총편집인 치엔치안(銭)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상 이상의 결과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강해, 우리와 일치했다. 대만 문제도 빨리 해결할 수 없지만, 심각한 상황에 빠질 일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미국도 소련을 두려워해, 미국과 협력해서 소련에 대항한다는 마오쩌둥 주석의 생각이 굳어졌다.
당시 , 중국도 소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중소 대립은 1950년대부터 서서히 깊어졌지만, 1969년 중소 국경의 우스리강의 다만스키섬(宝)에서 양국군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 중국은 전쟁도 각오했었다. 국경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베이징()을 시작으로 각지에 방공호를 팠다. 긴 국경선을 공격으로부터 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남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때라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북베트남에서의 장기 지원은 부담이 컸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교섭할 좋은 타이밍을 찾기가 어려웠다라고 치엔(銭) 씨는 말한다. 베트남 전쟁이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반전 운동에 고민하고 있던 미 정권과 생각이 같았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접근할 것인가. 그 계기를 만든 것이 나고야였다.
등 떠밀린 일본 / 3개월이 안 돼서 조인
하지만, 그 미국과 중국의 접근이 이번에는 일본과 중국의 등을 떠밀었다.
동맹국에도 숨기고 행해진 키신저-방중에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접근과 그 후의 중국의 유엔 가맹으로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의 흐름이 가속되었다.
1972년 7월 6일, 새로운 수상으로 선출된 다나카 가쿠에이(栄)는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서두를 것을 명언했다.
신문을 읽은 저우언라이 수상은 중국 외무성의 담당자들을 모았다. 그 중에는 저우언라이의 통역이었던 왕샤오시언()•중일 우호협회 부회장도 있었다. 왕() 씨는 저우언라이의 대일 외교 통솔을 이렇게 회고한다.
다나카() 수상에게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저우언라이 총리는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다들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총리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말했지요. 총리는 자신이 보고서를 써서, 마오쩌둥 주석에게 보고했습니다.
저우언라이의 아이디어는 9일 드러났다. 남예멘 대표단의 환영 연회의 인사말 도중에 다나카 발언에 대해 언급했다. 환영할 만하다라고. 쌍방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9월 25일 다나카 수상은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들을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했다. 전쟁 배상과 대만 문제 등을 둘러싼 중국 측과의 격렬한 논의 끝에 4일 후, 국교 정상화라는 일중 공동 성명에 조인했다.
국제 정치 구조가 변화하는 가운데, 일본과 중국도 국교 정상화를 완수하였다.
하지만, 일중 간에는 약 20년간에 걸쳐 지금까지 이어온 민간 교류의 축적이 있었기에 실현 가능했다라고 왕() 씨는 강조한다.
일본 정부는 미국의 봉쇄 정책을 따라가, 신 중국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무역으로부터 민간 교류가 선행하여 정부를 이끌었다. 이민촉관()이야말로, 중일 관계의 특징이며 진실입니다라고 말한다.
마오쩌둥의 위신도 중요했다. 많은 중국인이 육친을 빼앗기거나 일본인에게 굴욕을 받았던 만큼 국민의 일본에 대한 원한은 뿌리가 깊었다. 그러므로 중국 전역에서 국교 정상화에 대한 선전 활동을 펼쳤다. 마오쩌둥은 제1차 대전 후, 독일에게 엄청난 배상을 요구한 것이 복수심을 일으킨 점 등을 예로 들어 국민들이 이해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두터웠고, 오히려 좋은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폐를 끼쳤다 / 미숙한 통역으로 생긴 응어리
공동 성명을 둘러싼 회담 중, 격론이 벌어진 일이 몇 번 있었다. 민폐 발언의 에피소드도 그 중의 하나다.
방중단이 베이징에 도착한 날 밤, 인민대회당에서 환영 만찬회가 열렸다. 다나카 수상은 인사말 중, 중일 전쟁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일본이 중국 국민에게 막대한 폐를 끼쳤던 것에 대해서, 나는 다시 한번 깊은 반성의 뜻을 표명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측의 통역은 폐를 끼쳤다라는 부분을 티엔라마환()이라는 중국어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 티엔라마환()이란 표현은 중국에서는 작은 일에 대한 사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중한 사죄의 말을 기대하던 많은 중국인 출석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그 때, 저우언라이 수상 곁에 있던 사람은 수상의 또 다른 일본어 통역인 린유인(韞) 씨, 중화 전국 귀국 화교 연합회 고문이었다.
린() 씨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통역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그 때, 각국 대사들의 영어 통역을 하던 탄웬션() 씨가 너무 가벼워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린()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우언라이 수상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회담에서 역정을 냈다. 티엔라마환이라는 말은 중국 인민의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중국에서티엔라마환이란 표현은 사소한 일에 사과할 때만 쓰는 표현이다.
중국 외무성 찬시안샨() 고문(당시) 등에 의하면, 다나카는 폐를 끼쳤다는 일본어 표현에 성심성의를 담아 진정한 마음으로 사과하며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다나카 스스로도 귀국 후에 다시 자민당 양원 의원 총회에서일본에서는 죄송하다, 더 이상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매우 강한 의지가 들어간 표현이다, 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결국 공동 성명에서는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라는 표현으로 결착되었다.
그러나 왜 발언의 취지가 상대방이 알 수 있는 표현으로 통역되지 않았을까. 그 때 통역을 담당했던 전 외무성 직원에게 취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당시, 외무성 팀의 한 명이었던 히로시마(広) 시립대학 부설 히로시마 평화 연구소 소장인 아사이 모토후미(浅)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화 교섭은 극비 사항이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요원을 모았다. 주요 간부는 중국어를 몰랐고, 정치적 센스를 가지고 번역문을 체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린씨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대중의 울분이 뒤에서 들려왔다. 총리가 티엔라마환이란 표현에 납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환영 만찬회는 일본의 지도자가 전후 처음으로 대륙 사람들과 마주하여 전쟁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재출발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다나카가 인사에 담았다고 하는 생각들은 그 자리에 있던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닿지 않았다.
중일 국교 정상화의 결과로, 일본과 대만의 외교 관계는 끊어졌다. 하지만, 중국은 그 후에도 일본과 대만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만약, 대만이 독립을 하려고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미국이 개입하고 일본도 동맹국인 미국을 지원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되면, 다시 일본과 적대국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염려마저 안고 있다.
국교 정상화로부터 36년.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크게 발전했지만, 대만 문제와 역사 인식을 둘러싼 마찰은 지금도 때때로 얼굴을 내민다.
이소가와 도모요시(
일중공동성명 요지
일본 측은 과거에 일본이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쳤던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반성한다
일본 정부는 중화 인민 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한다
중화 인민 공화국 정부는 대만이 중화 인민 공화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것을 거듭 표명한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중화 인민 공화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며, 포츠담 선언 제 8항에 근거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중화 인민 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의 국민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양국 모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패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이러한 패권을 확립하려고 하는 다른 어떤 국가 혹은 국가 집단에 의한 시도에도 반대한다
마오쩌둥(/모택동)(1893-1976)
중국 공산당을 이끌어 내전에서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화 인민 공화국을 건국했다. 1921년, 공산당 창설 제1회 전국 대표 대회에 출석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당의 주도권을 잡았다. 항일 전쟁에서는 국공 합작을 주창했다. 한편,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국의 실정에 맞게 수정한 마오쩌둥 사상을 확립했다. 건국 후에는 사회주의화를 추진하였지만, 급격한 생산 확대를 목표로 한 대약진 정책에서 실패하였고, 자연 재해도 겹쳐서 큰 피해를 냈다.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여, 중국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하였지만, (문화혁명은) 당과 국가에 큰 재난을 가져왔다라고 이후에 총괄되었다.
저우언라이()(1898-1976)
중국 공산당 주요 지도자의 한 명으로서, 마오쩌둥() 등과 함께 중화 인민 공화국의 건국에 공헌하였다. 1917년부터 19년까지 일본에 유학을 했다. 귀국 직전에 교토()의 아라시야마()에서 읊은 시 시비가 아라시야마에 있다. 건국 후, 수상(일시적으로 외상을 겸임)으로서 활약했고 1954년 평화 5 원칙을 제창했다. 일중 국교 정상화 후에 일본 재방문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병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기억을 만드는 것 - 4개 섬 일괄 반환
깃발은 내려졌는가
일본과 소련 국교 회복 당시에 결착되지 않았던 북방 영토 문제. 일본 정부는 오랜 세월 4섬 일괄 반환의 깃발을 올렸었다. 교섭 방침은 바뀌었지만 그 깃발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1991년 유연한 대처로 바꾼 방침
북방 영토에 살고 있던 전 도민들은 지시마 하보마이제도(歯) 거주자 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기 반환과 재산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작년 5월의 총회에서 약간의 이변이 있었다. 회의가 끝난 직후, 네무로() 지부 청년부의 간부들이 갑자기 앞에 나와서 결의 표명문을 읽어 내린 것이다.
회장에 있던 사람들을 더 한층 놀라게 한 것은, 결의 표명문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우리로서는 전 도민들이 살아있을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4 개 섬 일괄이라는 운동으로는 현상을 타파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운동을 전개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4개 섬 일괄 반환이라는 슬로건은 전후의 일본 정부가 오랫동안 내걸어 온 것이다. 북방 영토라고 하면 으레 4개 섬 일괄 반환이었다. 냉전 시대 때부터 정부와 자치제 주도의 운동에 의해 이 방정식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박혀 버렸다.
이를 전 섬 주민 2세들의 입장에서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의 표명문을 만드는 데에 동참한 하마야 쇼이치() 씨는 원래의 섬 주민들이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있는 가운데, 우리 2세들은 운동을 계승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4섬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섬을 돌려 받을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원래 섬 주민의 반수 이상이 벌써 사망했고, 생존해 있는 사람도 평균 연령이 74세를 넘는다. 진전이 보이지 않는 영토 교섭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북방 영토와 바다를 사이에 둔 네무로() 사람들이다.
실은, 일본 정부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가을에 4개 섬 일괄 반환이라는 깃발을 사실상 내리고 있었다. 이를 대신하는 방침으로, 소련과 러시아 측에게는 4개 섬의 일본 측의 귀속이 확인되면, 실제 반환하는 시기와 형태, 조건에 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한다라는 입장이었다. 4개 섬 일괄반환을 요구하는 것과 4섬에서의 일본의 주권을 확인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섭 방침의 전환이 일본 국내에서 충분한 이해를 얻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차이를 알고 한 일인지, 알지 못하고 한 것인지, 몇 년이 지나도 정당 간부들의 발언을 통해 4섬 일괄 반환이란 말이 때때로 들린다.
올2월 7일북방 영토의 날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북방 영토 반환 요구 전국 대회가 도쿄() 구단()에서 열렸다. 인사말을 한 이와쿠니 데쓴도() 민주당 국제국장은 북방 4섬 일괄 반환은 모든 정당의 공통된 소원임을, 민주당을 대표해 여러분에게 전한다라고 했다.
민주당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 간사장이 작년 2월에 4섬 일괄 반환은 천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라는 것과 교섭 방침이 다를 수도 있지만, 전 섬 주민들은 이 모순적인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내셔널리즘이라는 강한 자장
그럼, 왜 4섬 일괄 반환이란 말이 사라지지 않는가.
영토 교섭에 깊이 관여한 작가로서, 전 외무성 주임 분석관이었던 사토 마사루() 씨는 내셔널리즘 일반은 그 시점에서의 가장 강한 요구가 정당한 요구가 되기 때문에, 단계적 반환보다는 일괄이라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설명한다. 덧붙여, 일본 정부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한정된 몇몇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있었다. 책임 설명이라는 발상이 결핍되었던 것이지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정부 관계자,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또 하나의 뿌리 깊은 문제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패전의 수용이다.
아무리 일본 측이 국제법상의 정당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러시아 측은 4섬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다. 왜 일본은 패전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는 논리로 대항한다. 러일 전쟁에 져서 영토를 할양 당했다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논리는 러시아에서는 별반 비판도 없이 받아들여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일본에게 있어 북방 영토 문제는 전승국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다. 패전이란 어떠한 부조리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라는 말이다. 특히, 냉전 시대의 소련은 그런 문제 제기하는 데에 어떠한 사양도 필요 없는 상대였다.
북방 영토 문제는 지금도 이러한 강한 자력이 움직이는 곳에 있다. 국민의 비원이라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내셔널리즘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지만, 내셔널리즘과 깊이 연관될수록 타협은 어려워진다.
어느 러시아 정부 고관이 말이 인상에 남는다.
전쟁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고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한다. 전통적인 발상으로는 내셔널리즘을 넘을 수 없다. 내셔널리즘을 넘기 위해서는 서로의 관계 발전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눈으로 상대의 중요성을 보아야 한다.
사토 가즈오()
전 외교관 도고 가즈히코(郷) 씨
시코탄섬()과 하보마이제도(歯)는 반환 받고, 구나시리(国)와 에토로후(択)는 포기한다는 은 오해였다
근본적으로는4개 섬 일괄 반환이라는 깃발 아래, 단호히 주장만을 계속하면, 국내적으로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는 일부 외무 관료들의 안일주의도 느껴졌다.
2002년 4월, 네덜란드 대사를 면직당한 도고 가즈히코 씨는 작년 5월에 출판한 북방 영토 교섭 비록, 없어진 다섯 번의 기회(신쵸샤()) 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고(郷) 씨는 소련 과장, 유럽 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고르바초프 이후의 영토 교섭에 거의 일관되게 관여하여 영토 문제를 움직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스즈키 무네오() 중의원의원과 연결하여, 대러시아 외교 추진에 혼란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외무성을 쫓겨났다.
집필 동기에 대해서 어떤 상황 속에서 러일 관계가 움직였으며, 왜 관계가 악화 됐는지를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면직에 이른 경위와 냉전 붕괴 전후부터 수십 년 간에 걸친 교섭의 내막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4개 섬 일괄 반환으로부터의 전환을 국민들에게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상대인 러시아를 생각하면 굳이 양보했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의는 백퍼센트 이쪽에 있다는 논의이어서, 주장을 꺾으면 불리하게 됩니다. 단, 지금 생각해 보면, 유력한 의원들과 운동 단체에 힘을 실어 더 설명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반성을 하는 것도, 자신이 제안한 1956년 선언을 기반으로 한, 병행 협의 방식이, 일본 내에서 2개 섬 반환론이라는 비판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도고 씨는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주장은 이러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든 협의를 시작하지 않으면, 입구에 들어가지 않으면, 출구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키워드북방 영토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아직 유효했던 일소 중립 조약을 무시하고 대일 전쟁에 참전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후인, 8월 28일부터 9월 5일 사이에, 구나시리(国), 에토로후(択), 시코탄섬()과 하보마이제도(歯)를 점령했다. 일본 정부는 전재 후, 이 4섬을 북방 영토라고 부르고 소련과 러시아에 대해 반환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지시마 하보마이제도(歯) 거주자 연맹의 조사로는 1945년 8월 15일 시점에서 4섬에는 3124세대, 1만 7291명이 살고 있었다. 총면적은 5036평방킬로미터로, 후쿠오카현()보다 조금 크다.
키워드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정식 명칭은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이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되었다.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어,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다. 그러나 전면강화가 아닌 미국과 그 우호국만이 조인을 한 단면 강화 조약이었다.
북방 영토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2조 C항에서 일본은 지시마 (, 쿠릴 열도) 및 일본국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로서 주권을 획득한 가라후토()의 일부와 이에 근접하는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지었다. 조약의 초안은 미국과 영국이 작성하였고, 소련이 조인할 전망이 없어졌다는 이유 등으로, 일본이 포기한 후의 귀속지를 명기하지 않았다. 또한, 지시마에 대한 정의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본 정부는 조약을 비준하는 국회에서, 지시마에는 구나시리(国), 에토로후(択)도 포함된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고 있었지만, 그 후 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시리즈 지식인 20 명에 듣는다 -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8
텟사 모리스 스즈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교수
조선반도(한반도)가 결정하는 동아시아 구조
동아시아의 역사 구조는 세 개의 레벨로 생각하면 알기 쉽다. 첫 번째는, 비교적 큰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이다. 즉 일본, 중국, 한국과의 관계다. 두 번째는, 대국과 그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와 지역, 류큐()와 대만(湾), 아이누 모시리 등과의 관계다. 세 번째는 서양 열강과의 관계이다.
아편 전쟁은 중화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 질서로 바뀌는 전환기였다. 화이()질서 속에서의 국민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화라는 중심이 있고, 그 주위에 류큐인, 만주족, 아이누 등이 거의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거기에 서양 열강이 들어와서, 중화 질서를 무너뜨렸다. 국민 국가로서의 중국, 일본, 조선이 형성되었고 작은 네이션은 흡수되었다. 그 과정을 밝히는 의미로, 제1차, 제2차 아편 전쟁을 들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도 한데 묶어서 제1차 조선 전쟁(한국전쟁)이라고 본다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측면들이 보일 것이다. 이것들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일어난 동북아시아의 전쟁이었다.
19 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문제는 언제나, 중일 양국이 어떤 식으로 열강과 균형을 이루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국의 사이에 위치한 조선반도의 운명에 의해서 중일 관계가, 나아가 지역 전체의 구조가 결정되었다. 조금 비약하자면, 현재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향후의 중일 관계는 북한이 어떻게 될 지에 달려있다.
세 번째로 동아시아 혁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러시아 혁명과 베르사이유 조약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은,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신 내셔널리즘이었다. 좋은 예로는 조선에서 3•1 운동이, 중국에서도 5•4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에서도 쌀 소동이 일어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사상이 강해졌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그다지 큰 것들이 아닐지라도, 동아시아 전체의 사상과 정치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제일 결정적이었던 전쟁은 만주 사변이라고 생각한다. 만주 사변이 일어난 후에는, 중일 전쟁과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원폭 투하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이라고 하기보다는 냉전의 시작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20 세기, 세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대전 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의한 일본의 점령만을 보기 보다는 동북아시아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본만을 본다면, 점령에 의한 민주화란 측면이 강하지만, 오키나와(縄)나 한국을 보면 억압적 측면이 비친다. 동북 아시아의 점령 시기는 우선 오키나와(縄) 복귀인 1972년까지로 했지만, 군사 기지는 아직도 남아있다.
중국 혁명은 긴 사건으로서 파악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일종의 거대한 사회적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희생을 지불한 대가이지만, 중국 국내에서 일시적으로 경제적인 평등이 실현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이렇게 만들어진 평등의 기반 위에 구축되었다.
제2차 조선 전쟁이 동아시아지역에 미친 영향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경제적인 특수 수요라는 것을 넘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59-60년은 큰 전환기였다. 일본에서는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안보 조약을 개정한 후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중국과의 단절이 깊어졌다. 한편으로, 중국은 소련에서 멀어져 제3의 대국이 되었다. 아시아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현재 상황을 보면, 중국의 경제 대국화가 중요하다. 이에 일본이 문화와 의식의 레벨에서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도 크다고 본다.
인터뷰 : 요시자와 다쓰히코()
약력
1951년, 영국 태생. 아이누와 재일 조선인 등 폭 넓은 시점에서 일본의 근대에 대해 연구했다. 근저로는 북한으로의 엑소더스
(Exodus)변경에서 바라본다등이 있다.
리스트
아편 전쟁
제1차 조선 전쟁(한국 전쟁)1894-1905
동아시아 혁명1917-19
만주 사변
원폭 투하
동북아시아 점령1945-72?
중국 혁명1927-49
제2차 조선 전쟁(한국 전쟁)1950-53
동북아시아에서의 힘의 균형의 변화=중소 대립, 미일 유착1959-60
중국의 경제 기적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