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마을에 있는 작은 다리의 큰 역할
중국은 8년 간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견디어 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베이징()과 난징()에서 멀리 떨어진 윈난성()의 조그만 한 마을의 작은 다리라고 한다. 나는 그 다리를 찾아갔다.
지금은 건기입니다만, 어제는 비가 내렸습니다
소수민족인 나시족 운전기사가 핸들을 잡으면서 말했다.
도로 곁의 종려나무와 고무나무, 바나나 잎이 흔들린다. 도로를 따라서 흐르는 시냇물의 바로 저 편은 버마이다. 지금은 군이 정권을 쥐었고, 국명은 미얀마로 바뀌었다.
윈난성() 서쪽 끝에 있는 로이리시(). 원틴(畹)은 로이리시()에 있는 인구 약 1만 명의 마을이다. 시가지에 원틴교(畹)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미얀마다. 낡은 다리와 새로운 다리가 나란히 가설되어 있다. 판자를 깔은 낡고 작은 다리는 통행금지다. 전쟁중 이 다리를 통하여 미국, 영국 등지에서 대량의 물자가 중국에 운반되었다. 장제스()가 이끈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원장()루트였다.
운명을 쥔 물자 루트 / 인도로부터 공수도
전쟁의 불씨는 북방에서 상하이()까지 퍼져, 장제스()는 수도를 임시로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내륙 깊은 곳을 거점으로 한 지구전을 펼치려고 한 것이다. 더 깊은 내륙 쪽에 있는 윈난성()의 성도인 쿤밍() 주변은 병기 공장 등이 입주한 후방 기지가 되었고, 이러한 지역에 지원 물자의 원활한 운송 여부가 장제스() 정권의 존속을 운명 짓는 중요 문제가 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1937년 12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와 쿤밍()을 연결하는 티엔미엔(滇)도로의 돌관공사를 개시했다. 쿤밍()에서 원틴(畹)마을까지는 약 960km이었다. 이 중 원틴(畹) 마을부터 약 550km는 완전히 새로운 도로 건설이었다. 높은 산들을 넘고 큰 강을 건너야 했다. 주민을 비롯하여 약 20만 명을 동원한 인해 전술로, 3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다음해 8월에 완성되었다. 원틴교(畹)에서부터 버마의 도로로 연결되었다. 거기에서 약 190km 지점인 라시오부터는 철도가 있다. 즉, 인도양에서 랭군을 경유해, 철도와 도로로 쿤밍(), 충칭()으로 운반하는 대동맥이 생겼던 것이다.
원장()루트는 몇 군데 있었지만, 일본군은 태평양 쪽부터 하나하나 잘라 갔다. 1938년 10월에 광저우(広)를 점령하여 홍콩 루트를 차단하고, 1940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 베트남 등) 북부에 진주하여, 중국으로 연결되는 철도 루트를 막았다. 그 결과, 티엔미엔(滇)도로가 중국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군수품과 가솔린 등, 한 달에 수천 톤에서 1만 톤 이상의 물자가 운반되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발발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2년 1월, 일본군은 버마에 진군했다. 국민당 정부군도 버마로 원정군을 파견해, 영국군과 함께 맞서 싸웠다.
원틴마을에 사는 81세의 쉬이민쿤() 씨는 버마로 향하는 원정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질주하는 트럭 위에 회색 군복을 입은 남성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전송하는 마을 사람들은 담배를 병사들에게 던져 주었다. 많은 여성 병사를 실은 트럭이 오면, 따뜻한 수입품 커피를 내밀었다. 소녀였던 시민쿤() 씨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는 커피에, 여성 병사들은 기뻐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시민쿤() 씨는 크게 목을 저었다.
아뇨, 그렇지가 않아요.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전쟁을 위한 출진이었기 때문이었죠.
원정군은 패했다. 파견된 10만 명 가운데, 반수 이상이 사상 당했다고 한다. 버마 각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윈난성()에 쳐들어 왔다. 시민쿤() 씨는 두메산골의 소수 민족 마을로 도망쳤어요. 쭉 산에는 이것 저것 따서 끼니를 채웠어요.라고 회상했다. 4년 가까이 중국을 지탱해 온 티엔미엔(滇)도로도 마침내 끊어졌다.
그러나 미중 연합군은 새로운 방법을 썼다. 인도로부터의 공수였다.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곡예 하듯이 날아, 대량의 군사 물자를 운반했다. 하지만, 조종이 어려운 데다가, 악천후와 일본 군용기에게도 습격을 당해 약 600기를 잃었다고 한다.
1944년 봄, 중국과 미국, 영국은 인도 쪽과 윈난성()의 양쪽에서 일본군을 조이면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전쟁을 하면서, 인도 동부의 레드와 원틴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도 건설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원장()루트가 생겼다. 연합군의 중국에 대한 보급은 계속 되었지만, 반대로 일본군은 충분한 보급이 닿지 않았고, 윈난성()에서도 옥쇄(砕 명예를 위해 포로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함)가 잇따라 비장한 결말을 맞이했다.
베이징() 의 루거우차오()사건으로부터 8년. 일본군은 끝내 원장()루트를 다 끊을 수는 없었다.
원틴 마을 중심부에서, 당시의 저우언라이(来) 수상과 버마 수상이 박수를 치면서 걷는 모습이 그려진 큰 간판을 보았다. 일중 전쟁 종결로부터 11년이 지난 1956년 12월, 중국 쪽에서 열린 양국 변방 주민의 친목회에 출석하기 위해, 두 정상이 원틴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양국의 우호를 노래하는 시도 크게 쓰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양국의 우호 기념관도 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니, 최근 중국의 보도가 머리에 떠올랐다. 미얀마의 항구도시로부터 윈난성()에 가스와 석유 파이프라인을 건설한다고 한다.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석유를 미얀마 경유로 윈난성(), 그리고 충칭()에까지 보낸다. 그렇게 하면, 어떤 나라가 말라카 해협을 봉쇄한다고 해도, 중국은 석유를 확보할 수 있다. 중요한 전략적 의의가 있다고 보도되었다.
원장()루트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게 느끼면서 원틴마을을 떠났다.
국민당의 전투 / 평가하는 조짐
쿤밍(). 표고 1891m 고지에 있는 약 600만 명의 도시다.
일중 전쟁을 연구하는 윈난()대학의 쉬이칸민() 교수를 찾았다.
(루거우차오()사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8월 군사 회의에서, 윈난성() 주석인 롱윈()이 원틴 도로와 원틴 철도의 건설을 제안했습니다. 장제스()가 이에 찬동하고, (정부에) 윈난성()과 상의하라고 명했습니다
철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도로가 오랜 기간에 걸쳐 나라를 지탱했다. 쉬이() 교수는 윈난성()의 공헌을 설명했다. 이상하게 원틴 마을도 윈난() 전투도, 중국에서는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국공) 내전의 관계지요라고 쉬이() 교수는 말했다.
국민당이 인솔하는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내전을 정지하고, 공동으로 일본과 싸울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국지적인 전투는 일어났으며, 항일 전쟁 후에 자웅을 결정지었다. 공산당에게 있어서, 국민당은 적이다.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활약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이런 관계로 국민당 주체의 윈난()과 버마 전투에 관한 기억은 희미해졌던 것이다.
변화의 조짐이 있다.
재작년,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전후 60주년 연설에서 국민당의 공헌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군은 각각 정면 전장과 적후방 전장에서의 작전 임무를 담당하여, 함께 저항하고 반격하는 전략적인 태세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에는 배경이 있다.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은 타이완(湾)으로 옮겨갔고, 7년 전까지 타이완(湾)에서 정권을 잡아 왔지만, 지금은 야당의 입장에서, 여당인 민진당(党)에 의한 타이완(湾) 독립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공산당의 의도와 일치하여, 양당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윈난()과 버마 전투가 각광을 받는 날이 머지않은 시기에 올지도 모른다.
쿤밍()에는 전쟁 중에 많은 공장과 대학이 이사해 왔다. 동부에서 수십사나 되는 공장이 옮겨 왔기 때문에, 쿤밍()의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윈난성() 중국 근대사 연구회의 우어파오창(宝) 회장은 말한다.
기계와 제철 등의 공장들도 왔다. 비행기도 조립했다고 한다. 윈난성()은 지원 물자의 수송로였지만,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도 컸던 것이다.
작곡가는 쿤밍() 출신 / 영화 주제가가 국가로
시가지와 접해 있는 호수, 연못. 이를 조망하는 서쪽 산에 니에얼()의 무덤이 있다. 현지 출신의 음악가로, 의용군 행진곡의 작곡으로 알려졌다.
이 곡은 1930년대의 항일 영화 풍운아녀(児)의 주제가였지만, 항일 전쟁 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졌다. 중화 민족은 가장 위험한 때에 이르렀다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우리 모두 마음을 하나로 뭉쳐, 적의 포화를 돌파하여, 전진하자 (티엔한() 작사)라는 내용이다.
이 노래가 중화 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선택되었다. 이제 가장 위험한 때는 지나지 않았는가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의 저우언라이() 수상은 평화로운 때에도, 위험에 대비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티엔한()이 비판을 받아 일시적으로 연주만 하는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도 이 가사로 계속 불리고 있다.
항일 전쟁을 한 것은, 공산당 정권의 존립 기반의 하나이자, 국가의 토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항일 전쟁에 의해 태어난 국가는 이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니에얼()는 1935년, 일본을 경유하여, 유럽, 소련으로 유학하려 했다. 출발 직전에 작곡한 의용군 행진곡의 악보를 일본에서 고쳐 완성시켰다고, 중국 잡지는 전한다. 중국의 국가는 일본에서 완성한 것이 된다. 그 수개월 후에 니에얼()는 쇼난()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는 계속 살아 있다. 내년 베이징() 올림픽의 회장에서도 반복해 연주될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모두가 항일 전쟁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체험들을 풍화 시킬 수는 없다라는 의지를 느낀다.
이소가와 도모요시()
키워드원장()루트
미국, 영국, 소련 등이 장제스()가 인솔하는 국민당 정부에 군수품과 석유 등의 지원 물자를 보낸 루트다. 미국은 당초,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장제스(())의 요청으로 차관을 실시했다. 일본군이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에 주둔 하는 등 전선을 펼치자, 중국으로의 군사 지원을 확대했다.
일본의 대미영 개전 후, 구미 열강의 식민지는 차례차례로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이미 유럽 전선에서 독일에게 항복하여,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중국의 항전력 유지가 아주 중요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물자를 제공하고 작전 협력을 하면서 양면에서 중국을 지탱했다. 원장()루트는 중국의 생명선을 쥐고 있었으므로, 미국과 영국은 이 수송로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군과 힘을 합쳐 싸웠다. 그 최대 공방이 윈난성()과, 버마에서 전개되었다.
1942년 장제스()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연합군의 중국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전구 참모장으로서 스틸웰 장군이 미국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일본과 중국의 전쟁은 이와 같이, 일본 대 중국, 미국, 영국이라는 구도로 확대되었다.
소련 또한, 일소 중립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독자적으로 신장() 방면 등지에서 중국으로 지원 물자를 보냈다. 유럽에서의 독일 전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본군을 중국에 못 박아 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일대에 형성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말한다. 프랑스는 19 세기 중반부터 인도차이나에 출병해, 베트남 남부의 코친 차이나를 영유하고, 베트남 북부의 통킹, 중부의 안남,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하여, 보호국화 했다. 베트남의 종주국이었던 청조와 전쟁이 일어나지만(청불전쟁), 그 결과, 청조는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 지배를 승인했다. 프랑스는 1887년에 이러한 영토와 보호령, 보호국을 묶어서 인도차이나 연방을 만들었다. 후일 라오스도 편입시켰다. 프랑스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 하에서, 쌀과 고무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수출하는 대농원과 석탄 생산에 힘을 썼다. 중국으로 연결되는 철도도 건설했다.
메모니에얼()
(1912~1935) 윈난성() 출신의 음악가. 18세 경에 상하이()에 나와, 가극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곧, 공산당에 들어가, 많은 혁명과 항일 운동의 곡들을 만들었다. 쿤밍()의 니에얼()의 묘 옆에 있는 전시실의 자료에 의하면, 1935년 4월 1일, 반동파가 니에얼()을 체포한다는 정보가 흘러, 당 조직은 니에얼()을 일본으로부터 유럽, 소련으로 건너가 배우는 것을 허가했다. 니에얼()은 4월 15일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 왔다. 3개월 후인 7월 17일, 후지사와시(沢)의 구게누마()해안에서 익사했다. 후지사와시(沢)에는 니에얼()의 기념비가 있다. 또, 후지사와시(沢)와 쿤밍시()는 우호 도시로, 교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제6장 일중 전쟁(戦争)()
기억을 만드는 것/중국 영화의 악역
일본군 병사도 역시 인간
일본 귀신(). 항일 전쟁중 중국 민중들이 부른 일본병사의 명칭이다. 중국 영화에서는 빠지지 않는 악역의 대표 격이지만, 그 묘사가 예전과는 다르다.
항일 전쟁은 영원한 소재
어두운 지하 터널을 통과하자, 거기에는 한 농가의 부엌 자취가 남아 있었다.
베이징()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차로 약 90km 거리에 있는 치아오쵸원후(戸) 촌이다. 보리와 옥수수 밭이 펼쳐지고, 양 떼가 길을 횡단한다. 하지만, 한가로운 평원 아래에는, 항일 전쟁 때에 만들어진 총연장 11.6km의 지하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민중이 일본군으로부터 피신을 하고 반격을 할 수 있도록, 집과 우물, 마구간과 감시용 전망대 등을 연결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약 800m를 20년 전에, 지도전 유적 기념관 개설에 맞춰서 복원을 하고 보존하여 견학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지하도에서 촬영된 것이 영화 지도전(戦, 1965년)이다. 중국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는 항일 영화의 대표작이다. 연 관객 수는 12억 명(중국 영화 자료관)이라고 한다. 여성과 어린이도 힘을 합쳐 귀신()을 물리치는 이야기는, 항일 전쟁 시, 화북 평원에서 전개된 게릴라전이 모델이라고 한다.
중화 인민공화국 성립(1949년) 후인 1950~70년대, 항일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연이어 발표되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리우치민() 미디어 조사 센터 장은 소련과의 관계 악화 등, 국제 상황이 긴박하는 가운데,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민병과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목적도 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일본과 중국의 영화를 잘 아는 리우웬핑() 와세다대(稲) 비상근 강사에 의하면, 일련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본병사는 잔인하지만,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공통점이라고 한다.
취락을 불사르며 아이와 노인도 가차 없이 죽이는 등, 하는 짓은 잔학하지만, 용맹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도전()에 등장하는 일본군 대장은 얌체같은 콧수염에 동그란 안경을 낀 모습이다. 농촌을 덮친 후 저격을 당하지만, 총알에 맞은 곳은 엉덩이다. 지도전() 이전의 지뢰전(戦,1962 년)에서도, 일본병사는 지뢰 철거 장면에서, 아이가 묻은 분뇨탄을 손으로 잡으며 비명을 지른다.
중국 항저우()시 출신으로 영화, 영상론 연구자인 이엉슝(応) 홋카이도()대학 대학원 준교수는 당국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어릴 때 오락 작품으로써 보았고, 친구와 일본 병사 흉내도 냈다고 회상한다.
중국 내외의 약 3만 개의 영화 필름 등을 소장하고 있는 중국 영화 자료관(베이징())의 후홍신() 관장에 따르면, 항일을 소재로 한 영화는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변 후에는 항일전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는 작품이 등장했다. 주제가가 이후, 신중국의 국가가 된 풍운아녀(児)(1935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화 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항일 전쟁에 참가한 세대들에 의해, 전승 영웅을 기리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문화대혁명(1966~76년)을 거쳐, 이윽고 80년대의 개혁•개방 시대로 접어들자, 수많은 외국 영화도 접한 신진 감독들에 의해, 전쟁 그 자체 의미를 다시 묻는 영화가 등장하였다. 일본병도 인간으로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후() 관장은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진 항일 전쟁은 중국 영화에 있어서 영원한 소재다. 관객은 침략한 일본병과 지금의 일본인은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라고 얘기한다.
지금은 코미디에도 일본인 배우가 활약
산시성() 찐중()시. 옛 마을 풍경이 남아 있는 한 곳에서, 11 월 중순, 중국 중앙 TV(CCTV)가 내년에 방송 예정인 연속 드라마 대국의()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중화민국 시대에서부터 신중국 성립까지를 배경으로, 실존한 한의사 일가 우여곡절을 그린다. 등장하는 일본군 사령관이 중국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설정이다.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던 중, 중국 측의 포로가 되어, 군인으로부터 보통 인간으로 돌아간다.
제작 총지휘는 영화감독인 우쯔뇨우() 씨(55)이다. 중국 영화계에서는 제5 세대라고 불리며, 항일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등을 찍어 왔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만종()(1988년)에서는, 포로인 일본병사가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삶의 집착을 보인다.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사람들과 생명의 존엄성을 그리고 싶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기는 문화대혁명의 와중이었다. 노선 대립이 폭력으로 발전했으며, 사람이 죽는 것도 가까이서 목격했다. 우() 감독은 전쟁과 같은 괴로움을 맛보았다. 전쟁은 싫다. 원한으로 새빨갛게 물든 눈으로는, 전쟁의 본질은 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배우 가가와 데루유키() 씨가 일본 병사 역을 맡아, 2000년 칸느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장원() 감독의 귀신이 온다(来(코이즈라이라))등, 이후에도 참신한 작품이 선을 보였다. 개혁, 개방으로 인해 영화 제작에도 민간이 참가 가능하게 되는 등, 다양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텔레비전에서도 낡은 명작을 리메이크 한 연속 드라마 방송이 잇따른다.
중국에서 활약하는 오사카 출신의 일본인 배우 야노 고지(, 35) 씨에게는, 항일전의 영웅을 그린, 제작중인 드라마 양청우()는 일본군 병사 연기의 8번째 작품이다. 조국을 그리워하며, 고향에 남겨둔 아내를 애처로워하는 역으로, 야노() 씨는 이제야 자신다운 표현을 할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의 작품에서도 그들(일본병사)도 역시 인간이라는 것에 유의하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촬영 전에는 중국어와 일본어 사이트, 책 등으로 역사를 조사하고, 감독 등과 어떻게 연기할지를 상의했다. 중국에서도 정보가 늘어나 스테레오 타입의 작품은 외면을 받는다. 일본군 병사의 나쁜 모습만을 그릴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묘사한다면, 중국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중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일본군 병사 역을 일본인이 맡아 연기한다. 잡지 인민 중국의 왕쭝이() 편집장은 이것도 개혁, 개방 정책의 성과의 하나다. 이전에는 일본인이 중국 미디어에서 활약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항일 전쟁이 지금은 코미디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등 다양화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영웅은 등장하지 않고, 일본군 병사뿐만이 아니라, 주의의 중국인도 웃음의 대상이다. 왕() 편집장은 항일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극이라는 하나의 장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정착했다. 중국 민중에게 있어서는 이미 원한만을 품는 대상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의 대상이 되어 있다라고 해설한다.
나카노 아키라()
역사는 살아있다 동아시아 150년 시리즈
지식인 20명에 듣는다--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2)
권오기(権) 전 동아일보 사장
아시아의 근대란 한마디로 말하면 서양과의 교제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미국과 중국은 큰 존재다. 거기에 일본의 성공과 실패가 관련된 구도다.
일한이나 일중 관계를 한 쪽 당사자의 눈으로만 일대일로 보는 것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란히 보면, 서로를 더 잘 알 수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을 보면 악마로 보이고, 일본에서 한국을 보면, 개화가 늦어서 야만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일국사를 넘어 서서 역사를 늘어놓고 한번 보자. 그리고 이웃에게의 배려도 필요하다. 일본의 용감한 역사를 말할 때에, 그 용감함으로 인해 희생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의 근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2차 대전 후, 승리한 미국이 압도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큰 존재가 되어, 미국을 빼 놓고는 아시아는 말할 수 없다. 일본의 민주화는 미국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일본은 미국에 제품을 수출해 경제 대국이 되었다. 미국이 아시아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21 세기가 아닐까.
미국의 강점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설이 있겠지만, 나는 직업상, 언론의 자유를 제일로 꼽는다. 정부의 의견과 다른 저널리스트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은, 우선 국가가 있고 거기에 따르라는 발상은 아니다.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 마오쩌둥()을 세계에 알렸다. 아시아의 저널리스트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이웃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일본의 존재는 크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이득이다라는 말을 듣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제국주의국의 지배보다 가혹했다. 일본 자신이 궁핍했기 때문에, 조선을 혹독하게 수탈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를 한 예는 별로 없다. 1995년의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는, 일본이 국책을 잘못 행했다라고 사죄를 해, 평가된다. 그러나 모처럼의 담화를, 일본의 정치가가 몇 번이나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일본은 정말로 사죄하지 않았다라고 의혹을 갖게 된다.
전후, 일본은 가치관을 크게 바꾸어 군국주의 국가로부터 문화 국가가 되었다. 1949년에는 유카와 히데키()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51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黒) 감독의 라쇼몽()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일본의 문화가 세계 레벨에서 인정받았다. 당시, 한국은 한국 전쟁으로 문화를 말할 경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러웠다.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 국가로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것을 평가하고 싶다.
1950년 한국 전쟁에 나는 포병으로 참전했다. 17세였다. 애국심이라는 것보다 어차피 군대에 갈 거라면, 생각이 맞는 친구와 함께 군대에 가려고 지원해서, 평양으로 갔다.
북한은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 폐가 되는 이야기다. 지금도 휴전 협정 밖에 없는 불안정한 상태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합의해서 조선을 남북으로 분단한 것은 아니다. 전쟁에는 미국과 중국이 참전하여, 대국의 이해가 얽혔다. 통일을 하자고 해도, 우리 민족만의 합의로는 부족하다.
중국은 근대화를 진행시키는데 양무 변법이라며, 여러 변혁을 해 봤지만, 가까스로 도착한 것은 공산 혁명이었다. 지금은 개혁, 개방이다. 사회주의는 평등을 존중하고, 자본주의는 자유를 존중한다. 이 두가지는 근대의 가치이다. 이것을 중국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 개혁, 개방이다. 과연 중국은 정치를 민주화 할 수 있을까. 큰 숙제이고, 주시해야 한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리스트
제2차 대전 후, 미국의 압도적인 존재(이하, 무순서)
아편 전쟁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청일 전쟁
러일 전쟁
한반도의 식민지화
전후 일본(군사로부터 문화에)
한국 전쟁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
미중 관계 정상화
중국의 개혁, 개방
약력
권옥기. 1932 년생. 1963년, 한국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서 일본에 와, 한일 국교 교섭을 취재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부수상겸 통일원 원장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