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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Posted January. 27, 200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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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13세. 서울 등촌초등학교 6학년. 정표가 남긴 이력의 전부다. 굳이 하나를 더 보태자면 작가 지망생. 그는 연필을 쥘 힘조차 없을 때면 엄마에게 일기를 불러 줄 정도로 일기에 집착했다. 정표의 어머니 김순규(41) 씨는 정표가 경건한 종교 의식을 치르듯 하루하루 일기를 써 내려갔다고 했다.

일기는 소년에게 희망이었다. 살아 있다는 징표였다. 고통이 밀려올 때면 더더욱 일기장을 부여잡았다. 자신의 고통을 빠짐없이 일기장에 기록하고자 했다. 언젠가 작가가 되면 자신의 투병기를 소설로 쓸 계획이었다.

정표의 투병기는 소설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달 14일 눈을 감았고 2년 가까이 써 내려간 일기는 숨지기 사흘 전인 11일 끝이 났다.

하지만 정표의 투병 일기는 어느 소설보다 감동적이고 어느 희곡보다 극적이다. 한 소년의 투병 일기는 5000여 명에 이르는 국내 소아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오롯이 보여 준다. 그들에게 병이란 무엇이며, 가족과 이웃은 어떤 존재인지를.

난치병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www.wish.or.kr)은 정표의 투병 일기를 책으로 엮어 15일 그의 영정 앞에 바쳤다.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특별한 책을.

병에 걸리다

내가 백혈병에 걸렸다.(2005년 4월 20일)

정표의 투병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손이 떨리고 글씨가 이상하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아서인가? (2005년) 3월 30일 새벽에 코피가 심하게 나고 토를 해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러다 저녁쯤 백혈병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다. 무균실이라는 곳으로 들어가 머리를 밀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 봄바람, 봄꽃, 봄의 풍경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정표는 곧이어 생일을 맞았다.

4월 22일, 1년을 기다린 기쁜 날. 나의 생일이다. 하지만 난데없이 백혈병이란 놈이 내 몸속에 들어와 병원에서 보내게 됐다. 1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데.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다니. 나는 왜 이런 인생일까?

학교에도 정표의 소식이 알려졌다.

4월 26일, 내일 교장 선생님과 전교 (학생)회장이 온다고 한다. 나 같은 학생 1명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걱정을 쏟아 주는 게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은 항암 치료도 마지막이고 골수 검사도 한다.

하지만 골수를 이식해야 하는 정표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잇따랐다.

4월 29일, 우리 가족 중 나랑 골수가 맞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골수를) 찾아야 하는데 나에게 맞는 골수가 과연 있을는지. 만약에 (골수 이식을) 못 받으면 죽는다고 한다.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준다니 용기를 내자!

그 뒤 정표와 골수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이 국내에 5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이들은 모두 정밀검사를 앞두고 기증을 포기했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정표가 가장 힘들어한 것은 음식이다. 멸균식으로 불리는 병원 밥은 정표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게다가 항암 치료를 위해 정표에게 투여되는 스테로이드제는 식욕을 더욱 왕성하게 만들었다.

정표는 참을 수 없는 식욕조차 글로 달랬다. 라면 자장면 꽃게찜 햄버거 계란찜. 그가 먹고 싶다며 일기장에 숱하게 적은 음식들이다. 적고 또 적어도 참을 수 없을 때는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리며 자신의 본능을 이겨 내야 했다.



이재명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