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동물이다. 움직여야(動) 사는 존재(物), 그래서일까. 한동안 잠잠하던 걷기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걷기 하면 제주올레나 등산을 먼저 떠올리지만 섬에도 걷기 좋은 길들이 많다. 사단법인 섬연구소에서는 전국 섬마다 흩어져 있는 길들 중 대표 섬길 100개를 하나로 연결한 ‘백섬백길’(100seom.com) 사이트를 구축해 정보를 무료로 제공 중이다. 정부 부처와 지자체들이 국민 세금으로 만든 길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섬에서는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도 있고 섬의 토속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흑산도에는 백섬백길 가운데 38번째 코스인 ‘칠락산길’이 있다. 홍도 관광길에 잠시 들르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길. 소사리에서 상라산성까지 이어지는 7.1km의 칠락산길은 가파르지 않고 평탄한 능선이다. 이 길에서는 섬살이의 보물 같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흑산도 하면 사람들은 홍어를 먼저 떠올리지만, 과거 흑산도는 고래의 섬이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일제는 한반도 해역의 고래잡이 독점권을 장악한 뒤 우리 바다에서 40여 년간 1만 마리 이상의 대형 고래를 잡았는데 흑산 바다에서 포획한 대형 고래가 1446마리나 됐다. 그래서 흑산도에는 고래를 해체하던 고래판장이란 지명이 있고 고래공원도 있다. 영물이라 여겨 고래를 잡지 않던 흑산도에 고래고기 문화가 생겨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하지만 흑산도에 고래고기가 넘쳐나도 절대 고래고기를 먹지 않았던 집안이 있다. 바로 이곳에 사는 함양 박씨들이다. 과거 집안 사람들이 바다에서 위험에 빠졌을 때 고래가 생명을 구해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해 겨울 박 씨 집안 사람 몇몇이 흑산도 서남쪽 바다에서 조업 중 돌풍을 만나 위기에 처했다. 다들 뱃전에 바짝 엎드리면서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래 한 마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선 아래로 사라졌고 흔들리던 배가 잠잠해졌다. 저승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배 밑창으로 들어갔던 고래가 등에다 어선을 받치고 흑산도 쪽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고래는 사리마을이 보이는 지점에 배를 내려놓고 선회하다 돌아갔다. 파도가 여전히 거세 어선이 뒤집어질 것 같자 고래가 되돌아오더니 다시 등에다 배를 올리고 헤엄쳐 해변 근처에 내려놓은 뒤 사라져 버렸다.
언뜻 들으면 믿기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필자가 흑산도에서 만난 박 씨 집안 사람과 마을 사람들은 이런 고래의 은덕을 입 모아 얘기했다. 섬에는 이런 신비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내려온다. 섬이 스토리를 갖게 되고, 또 그 매력에 끌려 사람들은 더 섬을 찾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근 흑산도를 ‘K관광 섬’ 중 하나로 선정해 자산어보와 고래 등을 콘텐츠로 섬 관광을 활성화할 계획이라 한다. 고래와 사람들이 공존하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 자원을 활용해 흑산도를 고래 생태의 섬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올가을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섬 길로 걷기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