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릿 매팅리의 명저 ‘아르마다’는 무적함대의 탄생과 소멸 과정에 관한 가장 훌륭한 역사서다. 이 책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영국과 스페인 간 전운이 고양되던 시기 영국의 전설적인 해적왕 드레이크는 스페인 전력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기 위해 선제공격을 제안한다. 전설의 해적답게 스페인 항구를 습격하고 약탈하던 그는 건조 중이던 무적함대에 공급하기로 돼 있던 물통용 판자를 불태우는 전과를 올린다.
독에 있던 전함이나 대포나 화약도 아니고 겨우 말린 판자를 전과라고 할 수 있을까. 식수를 저장할 물통은 1년 이상 잘 건조한 판자로 제작해야 했다. 당장 물통을 공급해야 했던 스페인군은 허겁지겁 자재를 재발주해 물통을 제작했는데, 급하게 만들다 보니 완전히 건조하지 못한 판자가 납품되었다. 무적함대가 출항하자마자 식수에서 냄새가 나더니 색깔마저 이상하게 변했다. 그 물을 마시면 당연히 탈이 났다. 대원들은 식수 부족과 탈수로 허약해지기 시작했고 사기가 저하됐다.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도버해협에 도달한 스페인 함대는 기다리고 있던 쌩쌩한 영국 함대에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패전 원인이 물 때문만은 아니다. 함선의 성능, 전술, 수병의 능력 등이 있었지만 물통에서 썩어가던 식수도 작지 않은 요인이었다. 물통의 저주는 패전 후에 발생했다. 도버 해전에서 패했어도 함대와 선원의 생존자는 아직 많았다. 스페인으로 생환한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고, 병과 탈수로 거의 대부분의 병사가 사망했다.
전쟁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사령관의 책략, 야전군의 활약에 경도된다. 그러나 전쟁의 승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능력이 군수지원 체제와 야전의학이다. 많은 전쟁에서 무기로 인한 사상자보다 질병에 의한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이번 청해부대 백신 사건을 보면서 정말 충격이 크다. 고난도의 훈련과 첨단 무기는 국방의 일부분일 뿐이다.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