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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복구의 숨은 공로자들

Posted March. 10, 201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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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그렇게 애간장을 태운 적은 없었다. 2011년 3월 12일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서울에서 일본 후쿠시마()로 직행했다. 그날 정오 무렵 후쿠시마 공항에 도착했는데 도쿄 지사에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났다. 빨리 후쿠시마 벗어나라.

택시를 타고 후쿠시마 시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센다이()로 향했다. 하지만 피난민들이 몰리면서 도로가 꽉 막혔다. 평소 2시간이면 갈 거리를 12시간 동안 갔다. 그동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때 스트레스로 수명이 1, 2년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방사능 공포가 얼마나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지 온몸으로 경험했다. 그 때문에 사지()를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잘 안다.

박상홍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사무부()총장(45)도 사고가 터진 며칠 뒤 도쿄()에서 후쿠시마로 갔다. 민단 본부 차원에서 교민들 안전을 파악하고 고립된 교민들에게 식음료를 나눠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결혼 4년차였다.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후쿠시마를 떠나는데 왜 제 발로 찾아 들어가느냐고.

전상문 후쿠시마 민단 사무국장(68)은 사고 발생 뒤 두 달 동안 사무실에서 기숙했다. 전국 민단에서 보내오는 구호품을 받아 후쿠시마에 있는 교포들에게 배포하고 보험대리업무도 맡았다. 그에게도 방사능 공포는 예외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피난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하루 수십 번씩 들었다. 가족은 오히려 의연했다. 전화를 걸어 어머니, 건강 괜찮습니까라고 물으면 내 걱정 말고 교민들 챙겨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전 국장은 사고 내내 현장에 남았다.

민단은 정상 통행이 가능한 일본 서부의 도로망을 이용해 야마가타() 현 야마가타 시에 구호품을 모았다. 그렇지만 물품을 피해지에 전달할 수 없었다. 동일본 지역은 도로 유실에다 가솔린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 발을 동동 구르던 때에 센다이 지역에서 중고차 가게를 하는 한국 교포가 나섰다. 그는 중고차에 들어 있는 모든 기름을 빼 민단 차량에 제공했다. 그의 헌신이 없었으면 컵라면과 생수가 현지 교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류가 마비되면서 후쿠시마에 도착한 이후 이틀 동안 밥 구경을 못 했다. 지진해일(쓰나미) 피해가 컸던 미야기() 현 나토리() 시의 해변 마을을 취재하고 있는데 힘내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이 도쿄와 니가타()에서 재료를 공수해 와 밥과 국을 현장에서 만들었다. 몰골이 이재민과 흡사했던 기자도 줄을 섰다. 이틀 만에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위를 돌아보니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며.

내일로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꼭 3년이 된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해 1만8000여 명, 피난민은 27만여 명이다. 재일교포 중에서도 약 150가구가 삶의 터전을 등지고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쓰나미가 지나간 뒤 1년마다 한 번씩 현장을 둘러봤다. 벌써 3차례 돌았다. 그럴 때마다 숨은 공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삭막했던 피해지에선 온기가 돌았을 것이다. 이들의 노력이 삶의 활력이 돼 살아남은 모든 분들에게 희망을 주는 날이 앞당겨졌으면 한다.